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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마왕퇴와 전국 초묘 미라

[마왕퇴와 그 이웃-25] 팽륭상彭隆祥 (25)

by 초야잠필 2025.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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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륭상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마왕퇴 고시연구라는 책은 당시 중국사회의 전통에 따라 집체창작으로 

누가 쓴 것인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 기억으로는 이 책에는 호남의학원인가 하는 이름만 적혀 있을뿐

팽융상이라는 이름은 따로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가 팽융상이란 이름을 접하게 된 것은 그 후 1980년대에 서구에 투고된 그의 영문 논문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나중에 고시연구 중국어 보고서 원문을 입수하여 보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팽융상은 서구의 출판물에 마왕퇴 연구결과를 영문으로 투고했는데 

그 내용은 고시연구에 쓴 내용을 간추린 것이었다. 

이 논문에는 문물출판사에서 나온 고시연구와는 달리 

그의 이름을 저자로 적어 냈다. 

이 논문을 보면서 필자는 중국의 고시연구 보고서 자체가 팽융상이 사실상 집필 책임을 지고 있었을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 팽융상이 국제학회 보고에 집착하고 있었는지 필자는 알 길이 없다. 

중국은 지금도 국제학회 발표에 목매달지 않는 분위기가 필자가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물론 훌륭한 국제학술지에 영문으로 논문을 발표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직 더 많은 이들이 중문 논문으로 발표하고 끝내는 경우가 지금도 많은 것 같다. 

그런 것을 보면 당시 필자가 팽융상의 영문 논문을 접하고서 느낀 생각은 

이 양반이 국제학계에 마왕퇴 연구 결과를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아마 그가 마왕퇴 미라를 보는 순간 누가 부검을 할 것인가 하고 회의에서 물었을 때

자기가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고 하는데 그것과 같은 동기가 이번에는 마왕퇴 연구결과를 해외에 발표하라고 계속 부추겼는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2007년에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 미라학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3년 전인가 4년 전인가 바로 직전 학회, 그러니까 아마 2003년이나 2004년일 텐데

그 직전학회 때 중국에서 누가 와서 미라 발표를 하고 갔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가 팽융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까지는 그가 서구 학회에 영문으로 투고한 논문을 볼 수 있어서

논문 출판을 하던 그 시기에 국제학회도 참가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그는 필자보다 30년 일찍 마왕퇴 미라를 계기로 우연찮게 연구를 한 결과

2000년대 초반까지 영문 논문을 발표하고 국제학회도 가서 마왕퇴 이야기를 하곤 했던 것 같다. 

그가 그 작업을 접은 것이 아마 2000년대 후반에는 그만두고

평범한 병리학과 교수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는데

왜냐하면 필자가 본격적으로 조선시대 미라 연구를 시작한 이래 
팽융상을 국제학회에서 한번도 대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가 미라 연구를 그만두던 그 시기에 필자가 조선시대 미라 연구를 시작한 것 아닌가 하는데, 

마왕퇴 연구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면

반드시 한 번은 꼭 짚어야 하는 인물이 바로 팽융상으로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진 인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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