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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관련 책을 읽다보 니,
중국에서 대형 목곽 묘실제도가 완성된 것은 전국시대와 서한시대 사이인데
이 시기에는 아직 관곽 바깥에 별도의 묘실을 쌓는 전통은 없었다고 한다.
제왕과 고위관료 등 무덤을 중심으로
관곽 바깥에 벽돌 등으로 별도의 묘실을 쌓는 전통은 서한 말에서 동한 초에 생겨난 것으로 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마왕퇴에서는 묘실 없이 관곽만 보이고,
남월왕묘에서는 관곽 외에 별도의 묘실을 쌓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두 무덤 모두 서한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책에서 본 위 이야기가 정확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건 마왕퇴 한묘가 만들어지던 시대에 이미 고위급 왕공 무덤은 별도의 묘실을 두는 것이 한 흐름이었다면
마왕퇴 한묘에서는 그것이 안 보인다는 점은
이 무덤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왕공급 무덤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왕퇴를 공부하다 보니 의문이 생겨 문외한이 글을 남긴다.
[신동훈 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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