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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마왕퇴 이전 고고학 발굴 중 확보한 시신을 보존해야 한다는 원칙이 없었다.
따라서 마왕퇴 이전에도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된 시신이 출현했고
그 사실이 보고서에 적시되어 있음에도 제대로 보존되지 않고 사라진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산동에서 발견된 명나라 노황왕 주단의 시신은 미라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전혀 수습되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명나라 신종의 릉인 정릉은 1957년에서 1959년 사이에 발굴되었는데
이 무덤에서는 신종과 왕비 일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인골 상태로 계속 보존되었던 것 같지만
1966년 문화대혁명 와중에 "지주계급의 우두머리인 만력제를 타도"한다는 명목하에 홍위병에 의해 모두 태워졌다.
때문에 마왕퇴의 시신 역시 발굴 직후 이는 보존할지 그렇지 않고 없애버려야 할지 명확한 기준이 없던 상태였는데
발굴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여 결국 국무원 도박구 유물담당자 처장인 진자덕에게 전화로 자문하였는데
그는 "여자 시신은 문화재적 가치가 없으니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회신을 내려 보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마왕퇴 미라는 그냥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는데
현지 책임자인 후량 (당시 박물관 부원장)은 진자덕의 명에 바로 따르지 않고 진자덕의 상관인 도박구 책임자 왕야추에게 다시 의견을 물었다.
왕야추는 급기야 이는 무조건 보존해야 한다는 명을 내려 마왕퇴 미라는 간신히 사라질 운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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