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상추일기는 유명하다.
그리고 노상추가 문과로 나가지 못하고 무과급제자가 된 데 상당한 불만이 있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렇게 대대로 사마시로 나간 자신이 무과로 간 데 불만이 많아
영남 지역은 차별받고 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영남 지역 사림들이 중앙 정계를 농단하던 15-16세기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는데,
이 시점의 과거 급제자 등을 보면 특별히 영남지역이 차별받은 것도 아니고,
경상도 지역은 여전히 과거 급제자에 있어 전국 탑클라스였다.
그렇다면 노상추가 왜 이렇게 생각했는가를 보면, 그의 비교대상이 다른 향촌 지역이 아니라 서울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서울에 거의 모든 부와 권력, 심지어는 문무과 급제자들까지 모여 있기 때문에
향촌의 사족들은 문과가 문제가 아니라 무과도 제대로 얻어 걸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현재 완전하지 않지만 남아 있는 무과방목을 보면,
서울이 전체 31프로인가를 차지하고
그 외에 전 인구의 1프로 이상의 급제자를 낸 지역을 보면 거의가 경기도 등 근기지역으로
무과 급제자는 태반이 서울 경기 지역에 몰려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노상추가 무과 급제라도 해서 선전관이 된 것은
향촌에서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남아 있는 조선 후기 호적을 보면,
이 호적이 대부분 지방 향촌의 호적인 고로,
전체 인구 중 문과 급제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무과 급제자도 극히 드물어 가물에 콩나듯 하니,
노상추가 스스로 무과 급제자라고 불만을 가진 것은 본인의 야망이 컸던 탓으로
실제로 조선후기 우리나라 향촌은 사족이 잘 나가 봐야 사마시 급제 정도,
무과 급제자도 거의 드문 것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그래도 동네에서 한 자리 한다고 하는 자칭 사족들은 유학으로 평생을 늙거나
아니면 납속 벼슬이라도 하나 사서 치레를 해야 할 판이 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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