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당지구로 풍납토성 보존문제가 한창 들끓던 시절 이야기다. 이곳은 아파트 재건축을 위해 1999년 발굴이 시작되고 이듬해 발굴이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 재건축 조합장이 포크레인을 동원해 발굴현장을 짓뭉개는 일로 발전했다.
풍납토성은 그 직전 동쪽 성벽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쨌으니 기억에 1998년 아니면 99년이다.
다시 그 직전인 1996년에는 현대리버빌 아파트 예정지가 발굴되면서 처음으로 이곳이 백제가 한성에 도읍하던 시절 가장 중대한 유적임이 비로소 드러났으니, 이를 통해 몽촌토성 신화는 붕괴했다.
하지만 그 중대성에 견주어 리버빌 아파트 현장은 결국 유적은 짓뭉개지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말았다. 이형구 선생이 보존을 외치며 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
경당지구 아파트 건설 계획 역시 개발이라는 압력이 무척이나 드세서 그 압력을 버텨낼 재간을 여간해서는 찾기 힘들었다. 이형구 선생은 역시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보존해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으니, 그 와중에 각종 압력과 협박에 시달렸다.
당시 문화재청장은 서정배. 문화재위원회가 저 포크레인 사건을 등에 엎고는 마침내 보존을 결정했으니, 그 직전 서정배는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문화재청장 직을 걸고서라도 개발은 막을 것이며 풍납토성은 보존하겠다."
이런 일이 있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나 역시 이 일을 졸저에서 빠뜨리고 말았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나마 뒤늦게 증언을 채록한다.
그때 이형구 선생한테 시달린 기자가 한둘이 아니다. 언론이 도와줘야 한다 해서 혼자서 백방으로 뛰어다닐 때였다. 이 양반 한번 겪어본 사람은 누구나 알지만 그 집요함에 혀를 찬다. 나 역시 그 집요함이 어찌 지겹지 아니했는가?
경당지구가 한창 논란이 되던 시절 그때 내가 선생한테 말했다.
"리버빌 아파트 때랑 이번 경당사태랑 다른 점이 무엇인지 선생님은 아세요? 김태식이 있고 없고입니다. 그땐 김태식이 없어서 못 지켰지만 이번엔 내가 있으니 지킬 겁니다. 두고 보세요. 풍납토성은 내가 보존하고 말테니. 나중에 선생님 돌아가시거든 풍납토성에다가 선생님 흉상 하나 제가 세워드릴께요."
풍납토성은 그래서 지켰다. 이형구가 있었고 서정배가 있었고, 그리고 김태식이 있어 풍납토성은 지켰다.
문화재는 영혼없는 성명서가 아니라 피와 땀, 열정, 그리고 희생으로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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