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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미산선생 휘호도 米山先生 揮毫圖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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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애제자 소치 허련(1809-1892)은 큰아들 허은(1834-1867)이 자신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하고, '미산'이란 호를 지어주고 정성껏 서화를 가르쳤었다.

하지만 그가 요절하자 실의에 빠진 소치는 다른 자식들에게는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넷째아들에게 그림재주가 있음을 알게되자, 소치는 '미산'이란 호를 그에게 다시 주고 그림을 가르쳤다.

그렇게 소치의 맥을 잇게 된 아들 미산(형과 구분하고자 小미산이라고도 하는)의 이름은 허형(1862-1938)이었다.

그는 일흔 넘게 살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고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도 했으며, 1928년에는 광주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형은 그 자신의 예술로써 평가받기보다 아들 허건(1908-1987)과 허림(1917-1942), 친족 허백련(1891-1977)에게 남종화를 가르쳐 근현대 호남화단의 큰 줄기를 만든 공로자, 가교 역할로만 이야기되곤 한다.

그래서인지 <소치 일가 5대전> 같은 전시에 그의 작품은 꼭 나왔지만, 그를 단독으로 다룬 전시는 아직 없었다.

이런 인식은 그가 남긴 그림이 산수건 모란이건, 사군자건 아버지 소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 보인다는 점에 기인한다.

물론 그런 세평이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같은 작가의 것이라도 작품의 편차는 있게 마련이다. 미산의 작품 중 어떤 건 아버지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그를 뛰어넘는 것도 없지 않다.

또 그는 글씨만은 아버지가 구사한 추사체를 벗어나 자기 글씨를 쓰려 노력했고 비교적 성공했다(수준을 떠나서).

그리고 그는 그림의 수요를 찾아 상업의 요충인 강진 병영으로, 그리고 개항장 목포로 삶의 근거지를 옮길 만큼 근대에도 어느 정도 적응한 인물이었다. 물론 생활이 아주 옹색했다지만...

어떤 미술사가는 "미산 없이 남농, 의재 없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나 아들을 빛나게 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미산 허형이란 인물과 그가 살았던 시대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내년은 미산이 서거한 지 85년이 되는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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