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족자 어느 농촌에서
한시, 계절의 노래(28)
농부를 슬퍼하며[憫農] 2수 중 둘째
[당(唐)] 이신(李紳) / 김영문 選譯評
벼논을 매노라니
태양은 중천
땀방울 벼 포기 밑
땅에 떨어지네
그 누가 알리요
밥상 위 밥이
알알이 모두가
고통인 것을
鋤禾日當午, 汗滴禾下土. 誰知盤中餐, 粒粒皆辛苦.
(2018.05.11.)
앞에서 소개한 이신의 「농부를 슬퍼하며(憫農)」 첫째 수와 짝을 이루는 시다. 첫째 수는 농부들이 겪는 구조적 모순을 강조하고 있다면, 둘째 수는 우리가 먹는 밥이 모두 농민이 흘린 땀방울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특히 이 시 마지막 두 구절은 거의 격언화 되어 중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신, 백거이, 원진, 장적(張籍) 등은 안사의 난(安史之亂) 이후 당나라 사회가 도탄에 빠지자 이를 문학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전개한다. ‘악부’는 한나라 음악 담당 관청이었고, 여기에서 민요를 수집하여 천하의 민심을 파악했다. ‘악부’에서 수집한 민요를 ‘악부시(樂府詩)’라 불렀으며, 후세 시인들도 ‘악부시’ 제목을 그대로 써서 현실 문제를 고발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신, 백거이, 원진, 장적 등 중당 신악부운동 참여자들도 ‘악부시’의 전통을 회복하여 당시 백성의 실상을 시작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악부시’의 제목을 그대로 쓰지 않고 현실에 맞는 새 제목을 달았다. 말하자면 ‘악부시’의 정신은 견지하고 제목은 바꾼 것이다. 이런 시를 ‘신제악부(新題樂府)’ 또는 ‘신악부(新樂府)’라 불렀다.
경기 연천 옥룡폭포에서
문제는 현대에 이르러 이들의 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비판이 격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추진한 신악부운동은 긍정할 만하지만 이후 이들은 사대부 지식인의 테두리에 안주하여 계급적 한계와 비현실적 이상만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특히 이신에 대한 비난은 더욱 심각해서 2000년대 이후에는 근거 없는 낭설까지 추가된 실정이다. 이신이 고관대작에 오른 이후 포악한 성격에 음식의 사치까지 더해져서 닭 혀(鷄舌) 요리를 즐겼는데 한 끼 식사를 위해 닭 300마리를 잡았으며, 이 때문에 그의 후원에는 닭뼈와 닭털이 산처럼 쌓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사 야사 어디에도 이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당나라 범터(范攄)가 지은 『운계우의(雲谿友議)』란 필기소설에 이신이 벼슬에 집착하고 성격이 강포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구당서』와 『신당서』 「이신전(李紳傳)」에는 이런 기록조차 없다. 또 유우석(劉禹錫)이 이신(李紳)의 호화로운 잔치에 초대받아 지었다는 「이사공의 기녀에게 주다(贈李司空妓)」라는 시도 두홍점(杜鴻漸)과 관련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고대의 인물이나 사건을 현대의 안목으로 다시 규정해보는 건 필요한 일이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현대의 관념을 무분별하게 고대에 적용하여 살아남을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신을 포함한 신악부운동 참여자들은 모두 유학자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以民爲天)’는 유학의 원리를 신봉하면서 이를 시로 표현하려 했다. 신악부운동은 그런 문학적 실천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이들을 비난하며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살지 않았다고 분노하는 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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