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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야기

부계 족보 출범의 의미

by 신동훈 識 2026.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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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성화보 서문

 
앞에서도 한 번 썼지만, 

우리나라 부계 족보(부계만 중심이 되는 족보라는 뜻이다. 이하 부계족보로 줄임) 출범의 의의에 대해 조금 써 본다. 

우리나라는 조선전기에도 족보는 제작되었고, 

남아 있는 것이 몇 개 없기는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빠른 것은 안동권씨 성화보

문화유씨 가정보지만

이보다 더 빠른 것도 있었다. 

임란 이후에 비로소 이전과는 다른 부계족보가 출현하는데, 

이 부계 족보에 대한 평가가 필자 생각으로는 좀 달리 봐야 할 부분이 있어

조금 적어본다. 
 

문화류씨 가정보

 
우리나라 임란 후 부계족보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신분이 낮은 이들이 동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족보에 들어갈 길이 열렸다고 보아도 좋다. 

거듭 말하지만 조선전기 족보들은 

모계와 사위까지 다 챙겼다는 이유로 조선 후기의 부계 족보보다 나은 평가를 받는 경우를 보는데, 

그게 아니고 조선전기의 족보들은 신분이 낮은 이들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레벨이 되는 사람들끼리만 적어 놓은 것이 조선전기 족보이며, 

임란 이후 조선후기, 부계족보가 시작되면서

비로서 왕후장상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성이 있는 자들은 모두 하나의 족보에 묶이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따지고 보면 조선후기 부계 족보가 만들어지면서

그때부터 족보에 넣어달라는 계보 불확실한 이들의 청원이 줄을 잇게 된 것도

조선전기라면 언감생심 족보에 편입되기 어려웠던 이들이

부계 족보가 되면서 비로소 신분이 낮더라도 동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족보에 이름 석자 올릴 기회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전기 족보에 비해서 후기의 족보는

그래서 나름의 발전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조선후기 부계 족보의 다음 단계는 서자가 서자라는 기록을 족보에서 떼 내는 것인데, 

노상추 일기를 보면 영-정조 시대에 이런 움직임이 격렬히 나타나고 있었고, 

19세기가 되면 확실히 족보에서 서자 표기는 많이 줄어들고

일제시대가 되면 족보에서 서자 표기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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