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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족보를 보면, 앞에서 썼듯이
부계로 동종의 사람들을 신분 가리지 않고 다 싣는 탓에
아무리 명문 집안 족보라 해도
전체 동종들 중 정말 명문 소리 들을 만한 혈족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인구가 6만 정도 되는 어떤 집안은
이 안에서 문과 급제자가 60여 명이 나왔는데
그 중 17세기에 생존한 어떤 사족의 후손들 사이에서만
급제자가 40명이 넘게 몰려 있고
나머지 20명이 그 외의 다른 종족들에 적당히 분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족들 족보가 전부 이러하니,
문과 급제자는 대개 한 문중에서도 극히 소수의 일부에 몰리기 마련이며,
이 문과 급제자가 나오는 후손을 중심으로 주변에
무과 급제자가 듬성 듬성 배치되며,
그 바깥으로 소과 입격자도 없이 명예직 품계나 받아 체면치례하는 종족이 나오고,
다시 그 바깥으로는 아예 그것도 없는 사람들이 최외곽을 형성하는 모습을 본다.
여기서 소과 입격자 하나 없이 명예직 품계나 받아 챙기는 종족이나,
아니면 그것도 없는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조선전기 같으면 족보에 들어가기 힘든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동족이라는 이유로 비로소 족보에 들어갈 길이 열렸으니,
임란 이후 부계 족보 성립은 역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매우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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