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방 사민은 흔히 세종대의 사건으로만 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오랜 기간 계속 중앙의 관심이 쏟은 국가 프로젝트라
북방에 여진족이 준동하거나 아니면 전염병이 도는 등
북방을 혼란에 빠뜨릴 일이 벌어지면 중앙의 비상한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우리가 범상하게 넘기는 것이 있으니,
왜 윤관 때는 실패한 사민 사업이 세종 때는 성공했느냐는 것이다.
필자도 당연히 여기에 대해서는 해답을 낼 만한 역량이 되지 않지만
북방 사민이라는 게 그냥 사업을 벌인다고 성공하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사민 사업이 정말 대단한 것이 두만강 압록강 선까지 진행된 것이 15세기였는데,
같은 위도에서 일본이 열도에서 사민이 진행된 것은 19세기 후반이나 되어서의 일로,
북해도 개척이 메이지유신 이후에나 본격화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각설하고-.
북방사민에 있어 여기에 도대체 누구를 데려다 놨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기록에 나오듯이 범죄자를 사민해라 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지만,
당연히 범죄자만 데려다 놔서는 그 동네가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는 법이라.
결국은 농민들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하삼도 지역 농사도 빠듯하기는 했지만 어쨌건 노비가 아닌 농민 중에 차출하여 북방에 보내되,
여러 가지 유인책을 썼을 것임은 쉽게 생각할 수 있겠다.
이런 경우 가장 많이 동원되는 유인책은 역시 세금 면제로
농사 짓는 땅에서 나는 소출은 초기에는 세금을 걷지 않는 방식으로 정착을 유도했을 것인 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 지역은 농사를 지을 농민들 외에도,
각 향촌의 눈에 가시 같았던 잉여 양반들-.
양반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서자를 위시한 자들은
어차피 세금도 안내고 버티고 있는 판이니 이들을 차출 TO에 포함시켜 사민 행렬에 끼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사민 TO가 할당되면 지방행정조직으로선 어떻게든 사민할 가구를 추려내야 하는 바,
농민들 외에도 동네에서 "놀고 있는" 서자를 비롯한 잉여 하층 양반 비스무리 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이 TO에 끼웠을 테고,
이 서자가 속한 "향촌 문중" 역시 누군가가 우리 마을에서도 나가야 한다면,
내가 아니라 서자 네가 가라, 했을 것은 뻔한 일 아니겠는가?
영조대에도 선무군관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향촌의 문중에서 알아서 할당하여 집안에서 만만한 이들을 차출하여 시킨 듯한 정황이 있으니,
사민 때도 누가 그러면 사민행렬에 낄 것인가, 관과 향촌의 문중이 논의한다면
당첨되는 것은 그 동네 양반 끄트머리 잉여 양반인 서족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은 북방으로 사민된 후에는 농사를 지었을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하삼도에서 양반 끄트머리인 이들이 북방으로 사민하여 이들을 어떻게 동원했을지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새로 사민한 북방 지역에 등장하는 "토관土官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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