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족보 이야기

19세기 만인소,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유학幼學들

by 신동훈 識 2026. 5. 18.
반응형

 

1855년 소위 영남지방 지식인들이 주도했다는 사도세자추존 만인소 중 서명자(부분). 뭐 생원 꼴랑 두 명에 나머지는 모조리 유학幼學을 칭하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만인소라는 것이 사실 그 이전에도 있긴 한데

19세기에 만인소가 여러 번 반복되었고, 

실제로 지금 남아 있는 것도 19세기 만인소로 안다. 

여기서 의문-. 

이 만인소에 서명한 이들은 도대체 향촌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만인소 서명을 서원을 중심으로 통문이 돈 것으로 아는데, 

쉽게 말해서 흔히 이야기하는 촌동네 청금록-향안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만인소에 참가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정이 가능한 바, 

문제는 이들이 만인소에 서명하면서 써 놓은 직역을 보면

진사 생원도 별로 없고 죄다 유학이라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다. 

이 만인소가 작성되던 19세기 중반이되면

우리나라 동네마다 유학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던 시절이다. 

유학을 칭하는 양반 아래에 수백의 노비가 줄줄이 달려 있던 호구가 무너지고, 

한 마을에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 그리고 구라로 적어 놓은 노비 한 명

이렇게 그야말로 딱봐도 소농인 가구들이 끝없이 펼쳐지는데 그 아버지와 자식들 직역을

죄다 유학으로 적던 시절이라는 말이다. 

이런 19세기 중반에-. 

그야 말로 향촌의 대표적 양반 씨족임을 자랑하는 이들이 모여 썼다는 만인소에, 

이름을 올린 이들이 거의 모두 유학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사회적 신분과 실제 향촌질서가 이미 큰 괴리가 발생했던 시기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19세기는 그야말로 한국사에서 드물게 보던 역동의 시대라

이 시대는 나라가 망하기 직전 개판인 시대로만 우리는 보지만, 

그 시대는 수천년간 숨죽여 살았던 평민의 자손, 노비의 자손들이 모두 궐기하여 

동네마다 잘나가던 양반들하고 직역을 다투면 둘다 유학이라

너나 나나 별차이 없는 놈이네...

라는 생각을 가지고 머리를 쳐들고 살기 시작했던, 

한국사 오천년에서 처음보는 시절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