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다.
그러나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등 다른 기전체 정사에 있는 “표表”와 “지志”가 없으므로 기전체 중에서 별격에 속한다.
진서 진수전에 삼국지 권수가 현존 판본과 동일한 65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정사正史 항목에도 진수가 짓고 배송지裴松之가 주注를 단 삼국지 65권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본래 진수가 표와 지 없이 본기와 열전만으로 삼국지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수서 경적지에는 삼국지 본문 65권 외에 서록敍錄 1권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록해 놓았으므로,
현재 이 서록 1권만 실전된 것이 아닌가 한다.
구당서 경적지에 오국지吳國志가 21권으로 기록된 사실도 오국지 맨 끝에 서록 1권이 붙어 있었음을 반증하는 증거다.
진수는 촉한에서 동관비서랑東觀秘書郞, 관각영사官閣令史 등 관직을 지냈고,
촉한이 멸망한 뒤 은둔 상태로 있다가 장화張華의 추천으로 진晉나라에서 좌저작랑佐著作郞, 양평陽平 현령, 저작랑著作郞,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 등 직을 역임했다.
따라서 진수는 진나라에서 벼슬하는 기간에 삼국지를 편찬했으므로, 진晉나라가 보위를 선양 받은 위魏나라와 위나라가 보위를 선양 받은 한나라를 역사의 정통으로 보고 이를 중심으로 삼국지를 기술했다.
이 때문에 삼국지 위서魏書에만 제왕의 본기를 두어 무제기武帝紀, 문제기文帝紀, 명제기明帝紀, 삼소제기三少帝紀라는 명칭을 썼으나,
촉한과 오나라의 제왕 전기는 모두 선주전先主傳, 후주전後主傳, 오주전吳主傳 등 열전의 명칭을 붙여 본기와 구별했다.
위서에는 또 삼국 분립 이전에 활동한 인물인 동탁董卓, 원소袁紹, 유표劉表 등의 인물 열전도 편입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삼국 분립에 원인과 단초를 제공한 인물들을 삼국지 열전에 함께 편입하여 당시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이와 반대로 위나라 후기 중신이며 권력자로 진晉나라 건국에 기초를 마련한 사마의司馬懿는 마땅히 위서에 열전이 들어가야 함에도 그에 대한 지면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 역시 당시 진수가 진나라의 관리로 재직하고 있었기에 진나라 창업에 바탕을 마련한 사마의를 아직 역사에서 평가하기가 어려워 고의로 회피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위서 마지막에는 오환전, 선비전, 동이전, 왜인전 등을 두어 국외 이민족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 또한 사기와 한서의 외국 이민족 열전을 계승한 체제인데, 위나라가 황제의 나라로 해외까지 포괄했다는 중원 중심의 사관史觀을 반영한 양식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촉서蜀書와 오서吳書에는 외국 이민족 열전이 없다.
아울러 진수는 사기와 한서에는 없는 방기전方技傳을 위서에 신설하여 의약醫藥, 음악, 관상, 역학, 무술巫術, 술수術數 등에 뛰어난 인물의 행적을 모았고,
촉서의 두주두허맹내윤이초극전(杜周杜許孟來尹李譙郤傳과 오서의 오범유돈조달전吳範劉惇趙達傳)에도 같은 성격의 인물을 모아 해당 나라의 방기전 역할을 하게 했다.
이는 당시 민간이나 국가에 일정 정도 영향을 끼치면서도 쉽게 소외되는 인물군을 역사에서 빠뜨리지 않기 위해 창안한 방식인 듯하다.
앞 이미지는 송나라 소희紹熙 건양본建陽本 삼국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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