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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소령원昭寧園, 영조가 만든 생모 무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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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석물배열도

 

 

훗날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礽君(당시 연성군으로 읽었음)은 생모(어머니가 아니라 생모임, 법적 어머니는 아님) 숙빈 최씨가 죽자 파주에 묏자리를 잡아 장사 지내고 당시의 일을 《무술점차일기戊戌苫次日記》에 소상히 기록했고, 그곳에 제청을 짓고 석물을 배설한 일을 《제청급석물조성시등록祭廳及石物造成時謄錄》으로 남겼으며, 수직방의 도배나, 석공들의 인건비 내역을 정리한 문서, 그리고 많은 묘산도를 남겼습니다.


첨부 도면은 《제청급석물조성시등록》에 실린 석물배치도입니다.


이후 소령원으로 승격되며 석물이 약간 추가되었지만, 원형은 잘 남아 있습니다.

* 내암 정인홍 후손으로 영조 이야기만 나오면 분개하시는 분의 댓글은 사절합니다. 그러면 조상 욕보인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2015.3.12)

 

 

*** 이하는 김태식 보강 ***

 

숙빈....품계로 보면 정1품이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같은 내명부 품계다. 

 

숙종 눈에 용케 띄어 왕자를 낳고, 그 왕자가 나중에는 왕세제가 되고 왕이 되니, 그가 바로 영조다. 


문제는 생물학적인 왕의 생모라 해도, 법적인 어머니는 아니었다. 종묘에도 못 간다. 제아무리 왕의 생모라 해도, 법이 그랬다.  왜? 종묘에는 오직 정부인만 남편 따라 가기 때문이다. 


조선은 철저한 일부일처제였다. 왕이라고 해도 마누라는 오직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마누라가 여러 이유로 예컨대 죽거나 쫓겨나거나 해서 다른 마누라가 들어앉을 수는 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정식 마누라가 둘 이상일 수는 없다. 
그것이 법이요 관습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다른 왕의 여인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우수마발에 지나지 않았다. 왕 또한 오직 마누라는 1명밖에 없었으므로 이들은 덤이요 부용에 지나지 않았다. 

한데 문제는 그것이 법이요 관습이지만, 인정이 그런가?

영조가 그랬다. 후궁 곧 첩의 자식인 서출이었기에 문제가 생겼다. 법적이 엄마랑 생물학적인 엄마가 달랐다. 그의 생모는 서출이었기에 결코 숙종 곁에 묻힐 수 없었다. 그 아들이 왕이 되었다 해서 그렇다면 그 아들이 자기 법적인 엄마 무덤을 파제끼고 그 자리에다가 자기 생모를 갖다 놓을 수 있는가?


그랬다간 왕이라 해도 목이 열개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 왜? 그건 패륜이요 강상의 윤리를 저버리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협을 하게 된다. 그 타협이란 무엇인가?

첫째 신주 문제....따로 모시자...어차피 후궁이라 종묘에는 못가니, 딴 데 모시자. 칠궁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둘째 산소....역시 따로 모시자. 대신 정식 왕릉 혹은 왕비릉 못지 않게 대대적으로 조성한다. 이것만은 신하들 너희도 좀 봐주라....신하들도 타협한다. 인정은 어쩌지 못하니 그럼 그렇게 하시고, 나중에 딴 소리 마십시오.  
 
파주 소령원昭寧園은 영조가 만든 생모 숙빈 최씨 무덤이다. 현장에 가본 사람이라면 느낄 테지만, 후궁 무덤인데 열라 크고 열라 넗다. 지 애비 무덤에 버금한다. 


엄마가 되지 못한 왕의 엄마....

그 삶은 처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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