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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육이오에 집이 불타 자료가 산실되자 선조고께서 서첩들을 만들었다. 동국명현첩 6책은 좋은 종이로 만들었지만 물자 부족으로 일부 서첩은 육이오 당시 삐라를 속지로 사용하였다.
이 박문수(朴文秀)의 편지 바탕에 보이는 신문지 같은 것이 육이오 때 북한군 삐라들이다.
나중에 저것을 다 분해해서 근대사 자료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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