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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허무를 격발케 한 속성수 버드나무

by taeshik.kim 2020.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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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마 우리 공장 양지웅 기자 사진이 아닌가 한다. 춘천일 텐데?

 

Willow trees that triggered the vanity of life

人生無常を誘発させたヤナギ

 

 

환공桓公이 북쪽으로 정벌하면서 금성金城을 지나다가 일찍이 낭야琅邪에 근무하던 시절에 심은 버드나무[柳]가 모두 열 아름쯤 된 것을 보고는 감정에 젖어 말하기를 "나무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사람이 [변화를]  견딜 수 있으리오!"하고는 버드나무 줄기를 부여잡고 가지를 매만지면서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 《환온별전桓溫別傳》에 말했다. "온溫은 字가 원자元子라, 초국譙國 용항龍亢 사람이라. 한漢나라 때 오경五更을 지낸 환영桓榮의 후손이다. 아버지 환이桓彝는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이 있었다. 溫은 어린 시절 호매한 기풍[豪邁風氣]이 있어 온교溫嶠한테 인정을 받아 누차 승진하여 낭야내사琅邪內史가 되어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에 승진하여 서하西夏에 진을 쳤다. 그때 서쪽 오랑캐가 아직 주벌되지 아니해서 남은 불씨가 숨쉬고 있었으니 환온이 친히 군졸郡卒을 이끌고 깃발을 앞세운 채 토벌에 나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쓸어버리고 선조의 능원에 제사 드렸다. 죽어 시호가 선무후宣武侯다."  

 

桓公北征經金城,見前為琅邪時種柳,皆已十圍,慨然曰:「木猶如此,人何以堪!」攀枝執條,泫然流淚。〔一〕 桓溫別傳曰:「溫字元子,譙國龍亢人,漢五更桓榮後也。父彝,有識鑒。溫少有豪邁風氣,為溫嶠所知,累遷琅邪內史,進征西大將軍,鎮西夏。時逆胡未誅,餘燼假息,溫親勒郡卒,建旗致討,清蕩伊、洛,展敬園陵。薨,謚宣武侯。」

 

이상은 [宋] 유의경劉義慶(403~444) 찬撰, [梁] 유효표劉孝標(462~521) 주注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 편을 출전으로 삼는다. 파란색이 유의경 본래 문장이고, 붉은색은 후대에 유효표가 첨부한 자료다. 

 

 

 

이 대목이 말하는 취지는 인생무상이다. 내가 심은 버드나무가 십년 혹은 이십년 지난 뒤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큼 세월이 흘렀음을 보고는 그에 감발해 눈물을 흘렸다는 뜻이다. 죽음을 직감했을 수도 있고, 아무튼 그 묘한 감정은 꼭 한마디로 짚기는 힘들지만, 그걸 둘러싼 미묘한 감정 변화는 포착하기에 충분하다. 

 

이 구절에 대한 논란이 역대로 많은 모양이라, 그 논란을 보면 주로 이 기록이 역사에 부합하는가에 모아지거니와, 내가 보건대 그 사건 무대가 왕청난 차이를 빚는 까닭이니, 

 

유의경劉義慶 본문을 보면, 이 사건 무대가 낭야琅邪라,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의 산동성 일대지만, 유효표劉孝標가 그것을 부연하고자 들이댄 《환온별전桓溫別傳》 관련 논급은 서하西夏이며, 그때 그가 정벌한 곳을 이수와 낙수라 했으니, 낙양 혹은 그 서쪽이 된다. 다시 말해 전연 다른 지역이 되어 버린다. 

 

김장환 역주 《세설신어世說新語》(上, 살림, 2001) 에서는 이 대목을 이렇게 소개한다. 

 

《진서晉書》 권98 <환온전桓溫傳>에 따르면 환온이 낭야내사琅邪內史가 된 때는 함강咸康 7년(341)이고 북쪽으로 요양姚襄을 정벌하러 가면서 금성을 지나간 때는 영화永和 12년(356)이므로 15년의 세월이 흐른 뒤임. 한편 양용楊勇은 《세설신어교전世說新語校牋》에서 환온이 태화太和 4년(369)에 연燕을 치러 가면서 금성을 지나갔다고 주장함. 양용의 주장을 따르면 28년이 지난 뒤임.(173쪽) 

 

그 어느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건 말건, 우리가 유의할 점은 세월이 주마등처럼 빨리 흘러감을 격발케 한 버드나무는 대표적인 속성수라 생장이 그만큼 빠르다는 사실이다. 그 간극이 20년이건 30년이건, 자신이 심은 버드나무가 순식간에 자라 아름드리가 된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생무상이랄까? 허무랄까?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버드나무를 뽑아버릴 순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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