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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스포일러, fact를 비트는 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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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비틀어댔다가 곤욕을 치르는 나랏말싸미

정통사극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다. 유동근이 태종 이방원으로 연기한 《용의 눈물》 같은 드라마가 대표적이라, 정통 사극이란 요컨대 史에 충실한 드라마를 말한다. 그것이 영화라면 정통영화라 하겠다. 

하지만 이런 정통사극이 TV나 영화판에서 슬금슬금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젠 아주 종적을 감추어 씨가 마르고 말았으니, 이제 그것은 셰익스피어 정통 연극에서나 만나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하긴 뭐 셰익스피만 해도, 이른바 그 원전에 충실한 작품을 만나기란 가뭄 끝에 피어나는 콩 이파리 같아, 그 유명한 로미오와 줄리엣만 봐도, 셰익스피어 텍스트에 충실한 로미오 앤 줄리엣은 종말을 고하곤 제목만 빌린 극이 활개를 친다. 이젠 그 정통극을 보려면 저 머나먼 잉글랜드 땅 스트라퍼드 오폰 에이븐 Straford upon Avon으로 가야지 않을까 싶다. 

정통사극이란 팩트에 충실한 극을 말하거니와, 예컨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정통사극이란 조선왕조실록을 필두로 하는 그 시대 신뢰성 뒷받침하는 이른바 팩트fact들에 기반해 그것을 줄거리로 삼는 드라마다. 그런 정통 사극이 이제는 종말을 감춘 것이다. 

실록 딱 한 줄로 만들어낸 허구 역사 왕의 남자

대산 그 자리에 이른바 타임슬림이니 뭐니 해서, 시공간을 무시하는 드라마 영화가 대세로 자리를 잡았거니와, 그에 덩달아 《왕의 남자》인지 뭔지 하는 영화는 실록에 단 한 줄 나오는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시나리오를 썼다나 어쨌다나, 그런 구절은 어떻게 용케도 찾아내고, 더구나 그것을 침소봉대해서 저와 같은 영화를 만들었는지, 그 기개 아이디어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런 정통사극은 드라마건 영화건 왜 사라졌을까?

나는 스포일러spoiler 때문이라고 본다. 스포일러란 무엇인가? 정해진 각본을 말한다. 

이 스포일러와 관련해 요새 주로 영화계에 집중하는 현상으로, 주로 기자들을 대상으로 본방에 앞서 미리 상영하는 일을 시사회라 하거니와, 이런 시사회에 그 감독 혹은 주연배우들이 나타나서는 그 작품을 미리본 사람들한테 각별히 당부하는 사항 중에 스포일러 금지 당부가 빠지지 않는다. 이 경우 스포일러란 줄거리 혹은 얼개를 말한다. 

영화나 드라마는 스포일러를 혐오한다. 그것은 미지의 탐험이어야 한다. 그래야 쫄깃쫄깃하다. 아이언맨이 죽는다는 시나리오가 공개된 어벤져스는 흥미가 반감하기 마련이다. 이 스포일러에 대한 혐오가 나는 정통사극이 설 땅을 없앴다고 본다. 


절반을 비틀어댄 드라마 선덕여왕 속 김유신


우리가 아는 역사란 실은 짜여진 각본이요, 알려진 시나리오다. 세종이 한글을 발명했다는 거, 계백이가 오천 결사대 이끌고 황산벌에서 유신이랑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으며, 그에 앞서 처자식 다 칼로 지기삤다는 건 알려진 각본이다. 물론 이를 토대로 삼되 그것을 극화하는 장치야 작가 혹은 감독 혹은 배우들 몫이겠지만, 이제 더는 대중이 이런 알려진 각본을 좋아하지 않는다. 

막 개봉했다가 이른바 역사왜곡 논란에 시달리는 영화 《나랏말싸미》도 따지고 보면, 발악이다. 무엇에 대한 발악인가? 익숙함에 대한 발악이요 짜인 각본에 대한 저항이다. 모든 역사 기록 다 들추어도 세종이 훈민정음 발명가임은 부인할 수 없는데, 느닷없이 신미라는 중을 들고 나온 이유가 그런 익숙함에의 탈피를 위한 몸부림이요 발악이다. 

계백이한테 막힌 유신이가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화랑들을 내몬다는 설정이야 역사에 그 편린이 보이지만, 그들을 계속 내보내며 하는 말 "꽃은 화려할 때 지는기야"는 순전한 허구다. 가미가제 특공대를 연상케 하는 그 섬뜩한 말은 순전한 창작이다. 

하지만 대중이 이제는 더는 그런 짜인 각본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왜 정통사극은 밀려났는가?


판타지로 가버린 아스달연대기


조선왕조실록을 필두로 하는 이른바 기록물의 무차별적 공급에서 기인한다. 돌이켜 보면 지난 20년간 실록과 고려사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누구나 보는 텍스트가 되었다. 뿐인가? 웬간한 조선시대 문집도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온전한 번역으로 다 보는 세상이다. 

이 틈바구니에 기존 역사학이 설 땅이 점점 좁아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물론 개중 약삭빠른 몇 사람이 역공하고는 그것으로써 장사를 잘 해먹고, 해먹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양날의 칼이라, 그리 잘나가던 놈도 단 한 순간에 날아가는 세상이다. 

그런 정통 역사학에 견주어 고고학이며 미술사니 하는 인접 학문은 상대적으로 텍스트가 아니라 감식 감별 심미안에 주안을 두는 까닭에 그런 외부의 무차별한 침략에 보호막을 치기는 했지만, 이 역시 끝났다. 다 끝났다. 


이젠 걸레가 되어버린 조선왕조실록. 특정계층만이 독점하는 텍스트가 아니다. 누구나 빨아 헹구는 걸레다.


쫑났다. 

암것도 아닌 흙그릇 두고 이게 팽이형 그릇이요 고조선 유산이며, 이것이 비파형동검이요 다뉴세문경이요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시대 끝났다. 하찮고 알량한 지식으로 되어먹지도 않은 이상한 일본말 한자어 찌거기 섞어쓰면 그것이 자연 짬뽕 전문가를 보증하던 시대는 끝났다.

특정 학문, 특정 학문 종사자가 그 전문지식을 독점하던 시대는 끝났다. 

지나개나 역사학자요 지나개나 기자인 시대다.

스포일러는 이제 정통역사학의 시대에 위대한 종언을 고하면서 한편에서는 위대한 판타지 문학의 시원을 열어제낀 것이다. 


토기? 토기 역시 걸레다. 물손질이 어떻고 소성도가 어떠며, 양식 변화가 어떠니 하는 식으로 더는 장난치지 마라.


*** 붙인다. 

이 혁명의 진원지는 한국고전번역원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이 문집총간과 그 번역본을 무제한으로, 전면 공개하기 시작했을 때 혁명은 거대한 물꼬를 텄다. 

그 혁명의 진원지가 한국고전번역원이라는 사실을 후세 역사는 기억해주기 바란다. 

한국고전번역원은 바스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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