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1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7인제럭비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시인 조병화
기자생활이 주는 묘미 중 하나가 돌발이다. 내가 한때 문학에 심취하기는 했지만, 기자생활 내내 그와 이렇다 할 인연도 없었으니, 그럼에도 가끔 이른바 문학인과도 접촉하게 되었으니, 시인 조병화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내 세대가 기억하는 조병화는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인가에 실린 '의자'라는 시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교과서에 실린다 함은 뭔가 대가급이고, 원로급이며, 그리해서 대체로 이미 이승을 등진 사람이다. 따라서 시인 조병화 역시 교과서에서 만나다가 그런 사람을 나중에, 것도 느닷없이 럭비경기장에서 만났으니, 좀 묘하지 않으리오?
내가 그렇게 조병화를 조우한 때가 1995년이니 물경 24년 전 일이라. 한데 그리 오래전 일임에도 그날 그 기억은 어제 본 듯 비교적 또렷하니, 당시 체육부 기자로서 꼬바리 기자였던 까닭에 이런 신참한테는 거개 존재감 전연 없는 기타등등 종목이 배정되기 마련이라, 럭비 역시 그리해서 나한테 할당이 되었다.
럭비....스포츠 기자라는 관점에서 무슨 뉴스가 되겠는가? 그래도 희한하게 나는 럭비가 끌렸으니, 그것은 당시 미식축구에 대한 우리 언론계의 광분한 이상 관심에 대한 반발이라는 의식도 컸다고 기억한다.
당시 신문들을 보면, 이 놈의 나라가 미쳤는지, 우리랑은 전연 관계도 없는 미식축구 소식 전하기 경쟁이 붙어, 그 경기가 있는 날이면 스포츠면 절반을 털어서 그 소식에 할애했다. 미식축구라....그 규칙도 모르는 마당에 무슨 양놈 전유의 스포츠란 말인가?
아래 기사에서도 언급되지만, 95년 11월 쌀쌀한 어느날, 지금은 디자인센터로 개장한 동대문운동장에서 7인제럭비대회가 열렸는데, 굿이나 먹고 떡이나 얻어먹잔 심산으로 경기장에 나갔다가 물끄러미 관중석을 바라보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뇐네가 빨뿌리 파이프 담배를 피면서 경기를 관전하는 중이었으니, 조병화 시인이었다.
한국문단에서는 다작多作으로 유명한 조 시인 작품으로 그리 나한테 심성을 깊이 파고든 작품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작이기 때문인지 무미건조함으로 일관하는 작품이 많았다고 기억하거니와, 그럼에도 그는 국어교과서에 당당히 등장하는 시인이었고, 그래서 아, 이런 사람을 럭비랑 연결해서 인터뷰 기사 하나 써보잔 심정으로 현장에서 조 시인한테 인사하고 이것저것 캐물어 완성한 기사가 다음이다.
그럼에도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저 세대를 선친이랑 연결하는 버릇이 있다. 조병화는 1921년생이라, 내 선친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것만으로도 묘한 동질감을 주는 그런 시인이다.
송고 1995.11.15 15:59:00
<럭비화제> 영원한 럭비맨 趙炳華 시인
(서울=聯合) "럭비는 나의 청춘입니다".
우리 문단의 원로 시인인 편운(片雲) 조병화씨(64)가 럭비 선수 출신이라는 점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편운은 암울한 일제시대에 국가대표까지 지내며 일본 원정을 하기도 했으며 또 현 대한럭비협회의 전신인 럭비축구협회 창립 멤버일 정도로 한국 럭비에서 조병화라는 이름을 지울 수 없다.
조병화
그는 말한다.
"시인 조병화보다는 럭비맨 조병화로 기억되고 싶다"고.
편운의 럭비에 대한 열정은 환갑을 넘어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에도 오히려 더 불이 붙는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8년 만에 부활된 7인제럭비선수권대회가 열린 15일 동대문구장을 찾은 편운은 트레이드마크인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문 채 까마득한 후배들의 훌륭한 플레이가 나올 때마다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시인으로서는 시집 42권을 펴내 한국 문단에서 이 부문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편운은 럭비를 주제로 한 시를 몇 편 쓰기도 했다.
"요사이 야구다 축구다 하지만 럭비에 비길 수는 없다"는 그는 "럭비가 가장 남성답고 희생정신과 단결력을 요체로 하는 스포츠의 극치"라고 럭비 예찬론을 피력했다.
1921년에 안성에서 태어난 편운은 16세때인 37년 럭비명문인 경성사범학교(중학교) 2학년 때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해방 때까지 10년간 그라운드를 누볐다.
김대중 정부시절 청와대 초대받은 조병화. 왼편에서 두번째가 조병화
그래서 몇 번이고 "럭비는 나의 청춘"이라고 강조한 그는 특히 41년에는 조선대표로 발탁돼 일본 관서지역 예선에 출전했으며 해방직후인 46년에는 럭비축구협회 창설을 주도, 이사로 재직했고 72년에는 경희대 럭비부장을 맡기도 했다.
선수 시절 100m를 12초에 주파할 정도로 스피드가 뛰어났던 편운은 처음에는 풀백이었으나 나중에는 오른쪽 윙으로 포지션을 바꾸었다.
"英연방 국가들을 보세요. 럭비장마다 관중으로 미어터지지 않아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언젠가는 럭비를 찾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라고 그는 한국의 럭비에 대해 낙관론을 폈다. ※사진 있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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