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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왕립호텔 혜음원의 탄생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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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혜음원지는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 작품이라,

이 발굴을 시작할 무렵만 해도 저 연구소가 경기도 일대 주요한 유적은 거의 독식하며 발굴하던 시절이었으니

마침내 저 혜음원지가 발굴에 들어가며 화려하게 등단하기 시작할 무렵 

저를 어찌 규정할지가 나로서도 무척이나 고민이었다. 

이를 위해 동문선이 전재한 김부식 혜음원기를 참말로 숙독 숙독하곤 했으니

저 동문선東文選 권 제64 기記에는 고려왕실이 혜음원을 세우면서 그에 즈음해 김부식이 쓴 그 창건 내력을 정리한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라는 글이 있으니,

이는 고려 산문을 대표하는 명문 중의 명문이라

나로서는 이 글을 숙독을 거듭하기도 한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저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는 박경식 형이 한창 현역으로 활동할 무렵이라

저 혜음원을 하나 상품으로 만들어야겠는데 형님은 뭐라 보오 했더니

그 특유한 퉁명함으로 왕립호텔이야 하기에 마침 내 생각이랑 비슷하다 해서 

이 발굴을 두고 나는 주구장창 혜음원을 그렇게 대서특필하기 시작했으니

이후 kbs 역사스페셜이 저걸 그대로 따다가 왕립호텔로 혜음원을 확립했다.

혜음원은 역원驛院이다. 단, 당시가 고려사회요, 나아가 그런 곳으로 왕이 개경과 남경南京을 오가는 길목에는 반드시 들르곤 하는 그런 역원은 당연히 일정한 규격 이상을 갖추어야 했으며,

무엇보다 사찰 또한 기능을 겸해야 했으니, 이렇게 해서 혜음원이라는 데가 탄생하게 된다. 

이로 볼 때 저와 같은 역원은 동시대 아랍 문화권과 견줄 때 카라반사라이다.

나는 신라시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지만 현재로서는 그 뚜렷한 흔적을 찾기는 힘든 형편에서 상대로 고고학 자료를 증빙으로 갖춘 고려~조선시대 역원은 카라반사라이랑 비교 검토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오늘 어찌하여 가을 성숙기를 맞아 친구 몇 명이 어디 갈 데 없나 해서 안내한 곳이 서울에서 가까운 파주라, 그 일환으로 이곳을 안내했다. 

친구들도 다 좋아해서 여간 다행이 아니다 싶었다. 

 
어영부영 보내 버린 파주 혜음원지
 
박물관 앞에서 좌절한 혜음원지방문자센터 vs. 박물관 밖의 박물관 경제발전전시관
 
골프공인 줄 알았더니 총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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