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애호가들한테 스키타이는 오리엔트 환상 특급 같은 존재라, 그걸 찾는다며 몽골 고원을 가고 중앙아시아로 날아들어서는 알타이 시원이니 바이칼호니 쳐다보고는 아 광활한 시베리아를 언젠가는 한민족이 누려야하는 상실한 고토古土로 상념하곤 하거니와
이것이 실제 학문을 직업으로 삼는 자들한테도 심성은 마찬가지라, 그네들이 뭐 저러한 광대한 영토주의로 무장한 심성을 재야사학이니 하면서 각종 삿대질과 비야냥을 쏘아대지만, 그네들 자신도 이 심성은 하등 다를 바 없어 문화이동 통로를 찾는다는 그럴 듯한 미명 아래 중앙아시아로 시베리아로 알타이로 달려가곤 하거니와
내가 볼 적에는 피장파장 똥끼나밑끼나 수준이라, 그런 그들한테는 언제나 흉노라든가 그에 앞선 시기에 집중 등장하는 스키타이가 아련한 동경임에는 틀림없다. 누가 누구더러 재야사학이며 민족주의 사학이라 공격하는가? 똥 묻는 놈이 겨 묻은 놈 나무라는 것과 무에 다른가?
요새 한창 주가가 오르는 데가 Ukraine 라, 남성들한테는 김태희를 능가한다는 미인이 득시걸하는 환상으로 각인하거니와, 그 실상이야 잠시 제껴두고, 이 글을 긁적이는 2022년 2월 25일, 구글 위키피티아 Ukraine 항목 중에 그 역사를 간추리면서 제공한 도판 중 하나가 저것이라, 그 출처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A gold Scythian neckpiece, from a royal kurgan in Pokrov (4th century BC), Treasury of the National Museum of History of Ukraine [uk]
기원전 4세기 무렵 포크로프 라는 지역 스키타이 한 왕릉에서 출토한 황금 목걸이로, 현재 국립우크라이나역사박물관 소장품이라는 설명이다. 비단 저 유물이 아니라 해도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광대한 초원 제국을 이룩했다는 스키타이가 남긴 황금문화는 저명하거니와, 유독 이 지역 저들이 남긴 무덤 중에서도 대따시한 그것을 쿠르간 kurgan 이라 하거니와,
이 쿠르간은 적석목곽분이라는 구조라는 특성에서 혹여라도 이후 대략 한반도 동남쪽 경주 일대에서 출현하는 신라 적석목곽분 시원이 된다 해서 고고학도라면 지나개나 한번쯤은 논급하고 지나간다.
시원? 시원은 개뿔? 무슨 시원이란 말인가? 같은 논리대로라면 잉카 제국이 남긴 피라미드는 이집트 후손들이 남긴 것이란 말인가?
문제는 저런 얼토당토 아니하는 논리가 파고들어 국가기관까지 그 시원을 캔답시며 저짝으로 달려가서 우리 손으로 발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국가기관 뿐인가? 국내 사설 기관들까지 덩달아 이쪽저쪽 가서는 쿡쿡 찔러대는 형국이다.
스키타이 스키타이 하지만, 실은 그 주축은 현대의 우크라이나가 중심이다. 물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겼지만 저네들이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곳은 우크라이나가 중심이 되는 흑해 북안 초원지대다.
우리 기준으로 이 나라는 땅덩이가 졸라 커서 60만3천628km2라, 프랑스나 독일보다 약간 크며, 한반도 기준으로 남북한을 합친 넓이가 22만제곱킬로미터요, 남한은 8만9천제곱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으니, 남북한 다 합친 세 배요, 남한 기준으로 거의 열배나 넓다.
남한에서는 1,950미터 한라산이 최고봉이요 그 아래가 1,915미터 지리산, 다시 그 아래가 1,708미터 설악산이라, 북한으로 가면야 2,744미터 백두산을 필두로 2천미터가 넘는 고봉이 즐비하다.
한데 저 넓은 우크라에서 최고봉은 Carpathian National Park에 위치하는 Hoverla 라는 산이라, 높이가 고작 2,061m에 지나지 아니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흑해 연안 드네프로강이 관통하는 저 광할한 우크라이나는 전체가 초원지대에 가깝다는 뜻이다.
이를 중심으로 몽골고원까지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는 초원 스텝지대 그 넓이로 국력을 논할 수는 없다. 그쪽 땅덩이 졸라 넓어봐야 서울 강남 백평에 지나지 않는다. 유목민은 그 특성상 이동을 상사常事로 삼거니와, 그네들이 오가는 지역 전체를 영역국가 개념으로 치환할 수는 없다. 그네들이 저 스텝지구 넓은 지역에 걸쳐 족적을 남겼다 해서 그네들이 강대한 영역 국가였니 하는 주장은 성립할 수가 없다.
스키타이에 대한 가장 믿을 만한 동시대 증언은 헤로도토스 《역사》다. 물론 이것이 저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아니며, 직접 증언이나 인터뷰를 통한 채록이 아니기에 신뢰성에 참말로 문제가 적지는 않지만, 그래도 풍문이라도나마 동시대를 산 사람이기에 그 증언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어쩌다가 우크라 얘기가 스키타이로 번져 어디에서 끝을 내야할지 모르는 지경에 내가 이르고 말았다. 애초 의도는 이것이 아니었다. 우크라 그 자체를 조금은 논하려고 얘기를 꺼낸 것인데 미안하다 독자들아, 엉뚱한 데로 흐르고 말아 이 자리는 우선 끝냄이 옳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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