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상태가 되면 귀가 앏아진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개중 하나로 복수 심리도 있다. 나를 해고한 자들을 향한 복수 심리 말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제안이 오면 괜히 솔깃해진다.
이때 스스로를 다스려야 하는데 옥석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뭐랄까 꼭 그렇다 하기는 힘들지만 뭔가 구린 냄새가 나는 제안도 분명 있다.
그런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뭔가 돕겠다 해서 내민 손들은 나는 아직도 고맙게 기억하며 그건 언젠가는 내가 갚아야 할 빚으로 안고 살아가야 한다.
해직기간 2년간 나는 공식직함이 없다. 한 학기 내가 친한 대학 후배님 추천으로 선문대 강의 한 학기하고 마침 한강문화재연구원에서 독립한 임영근 형이 설립한 매장문화재 조사기관 국토문화재연구원 등기이사로 올린 것이 그나마 공식직함 전부다.
이런저런 필요성에 따라 나는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이라는 대외 타이틀로 활동했다. 이게 여러모로 편하긴 했다. 연구원에선 혹 이 이름으로 활동하는 일이 불편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선문대 강사 생활을 한 학기만에 집어친 이유는 두어번 말한 것 외에도 또 하나가 있으니 그건 내가 고통스러워서였으니 학기 중엔 어디 외국도 나가기 힘들었다.
내가 저리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해고 사유가 상식으로 말이 되지 않았고 그런 까닭에 시일이 문제였지 복직은 따논 당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심 박근혜 정권이 끝나는 시점까지 3년은 걸리리라고 봤다. 한데 아다시피 촛불정국에 박근혜가 탄핵되는 바람에 복귀가 빨라졌다.
이런 사태 전개는 결과론이기는 해도 아무튼 복직은 기정사실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으니 해직에 이르는 과정이 번다했고 그 때문에 스트레스가 없었다고는 할 순 없었지만 막상 해직이 결정되고 나서는 홀가분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복직 판결을 받고는 복직은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만큼 기자생활에는 진절머리가 났고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이 역시 결과론이기는 한데 복직 소송에 바로 들어가고 또 그것이 대외에 공포되고 또 1심 판결에서 너무 싱겁게 완승을 하는 바람에 모든 게 엉클어지고 말았다.
나는 돌아갈 놈이었고 비록 내가 해직상태이기는 했지만 이런 사태 전개는 나를 여전히 기자로 옥죄는 역효과를 빚고 말았다.
나아가 나는 원치 않게 문재인 정부 해직기자 복직 1호가 됨으로써 나는 기자로 더욱 더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왜? 1호가 떠날 수는 없자나?
간단히 말해 나는 여전히 연합뉴스 기자였고 이런 인식이 나를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게끔 몰아가고 말았다.
그때 나는 선택했어야 했다. 기자 아닌 다른 길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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