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설신어世說新語》 제9 품조品藻 편에 네 번째 보이는 일화다. 제시한 원문에서 파란 고딕이 유의경劉義慶 본문이요, 나머지는 유효표劉孝標 주注다.
제갈근諸葛瑾과 그의 동생 제갈량諸葛亮, 그리고 이들의 4촌동생 제갈탄諸葛誕는 모두 성대한 명성이 있어 각기 다른 나라에서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촉蜀은 그 용龍을 얻었고, 오吳는 그 호랑이를 얻었으며 위魏는 그 개[狗]를 얻었다"고 했다. 제갈탄은 위에서 하후현夏侯玄과 이름을 나란히 했고 제갈근瑾은 吳에 있었으니 오나라 조정에서 그의 기량에 탄복했다.
〔一〕 오서吳書에 일렀다:제갈근은 字가 자유子瑜이며, 그 선조는 갈씨葛氏로 낭야琅邪 제현諸縣 사람이다. 나중에 양도陽都로 옮기게 되니, 양도에 그 전에 갈씨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본래 있던 갈씨와 구별해 제갈諸葛이라 칭하니, 그리하여 그것을 씨氏로 삼게 되었다. 제갈근은 어려서 효성이 지극하다 해서 칭송받았다. 누차 승진해서 예주목豫州牧에 이르렀으며 68세에 졸했다. 위지魏志에 말했다:제갈탄은 字가 공휴公休이며 이부랑吏部郎이 되어 부탁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바로 그 말을 공개하고는 채용했다. 나중에 그 타당서 여부가 제기되면 그 득실을 공개적으로 논의에 부쳐 포폄褒貶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뭇 관료가 그들의 추천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누차 승진해서 양주자사楊州刺史, 진동장군鎮東將軍, 사공司空이 되었다. 역모를 꾀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二〕 오서吳書에 말했다:제갈근이 난을 피해 강을 건너니 대황제大皇帝가 그를 취하여 장사長史로 삼았다. 촉蜀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동생인 제갈량과는 공적인 만남만 하고는 사적으로 만나지는 않았다. 또한 준수한 용모와 사고의 깊이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그의 큰 기량에 복종했다.
諸葛瑾弟亮及從弟誕,〔一〕吳書曰:「瑾字子瑜,其先葛氏,琅邪諸縣人。後徙陽都,陽都先有姓葛者,時人謂『諸葛』,因為氏。瑾少以至孝稱。累遷豫州牧,六十八卒。」魏志曰:「誕字公休,為吏部郎,人有所屬託,輒顯其言而亟用之。後有當不,則公議其得失,〔二〕以為褒貶。自是群寮莫不慎其所舉。累遷楊州刺史、鎮東將軍、司空。謀逆,伏誅。」並有盛名,各在一國。于時以為「蜀得其龍,吳得其虎,魏得其狗」。誕在魏與夏侯玄齊名;瑾在吳,吳朝服其弘量。〔三〕吳書曰:「瑾避亂渡江,大皇帝取為長史,遣使蜀,但與弟亮公會相見,反無私面。而又有容貌思度。時人服其弘量。」
【校文】
注「時人謂諸葛因為氏」「謂」下沈本有「之」字,「因」下有「以」字。案沈校所據宋本,與吳志注合。
注「後有當否」「有」下景宋本及沈本俱有「得失」二字。注「司空」景宋本作「以其」。注「反無私面」「反」,景宋本作「退」。
【箋疏】
〔一〕 嘉錫案:魏志誕傳不言誕為亮之從弟,然吳志諸葛瑾傳注引吳書曰:「族弟誕顯名於魏。」 諸葛恪傳載臧均表曰:「故太傅諸葛恪伯叔諸人,遭漢祚盡,九州鼎立,分託三方,並履忠勤,熙隆世業。」 又孫皓傳注引襄陽記,載張悌答諸葛靚曰:「且我作兒童時,便為卿家丞相所拔。」並可為誕與瑾、亮是同族兄弟之證。
〔二〕 魏志無「得失」二字。
〔三〕 李慈銘云:「案誕名德既重,身為魏死,忠烈凜然,安得致此鄙薄之稱?蓋緣公休敗後,司馬之黨,造此穢言,誣衊不經,深堪髮指。承祚之志,世期之注,削而不登,當矣。臨川取之,抑何無識!」嘉錫案:司馬之黨必不以孔明為龍。此所謂狗,乃功狗之狗,謂如韓盧宋鵲之類。雖非龍虎之比,亦甚有功於人。故曰「並有盛名」,非鄙薄之稱也。觀世說下文云「誕在魏與夏侯玄齊名」,則無詆毀公休之意亦明矣。太公六韜以文、武、龍、虎、豹、犬為次,知古人之視犬,僅下龍虎一等。凡讀古書,須明古人詞例,不可以後世文義求之也。胡應麟史書佔畢四曰:「漢末,諸葛氏分處三國,並著忠誠。以為蜀得其龍,吳得其虎,並自篤論。至魏迺曲為訾詆,此晉人諛上之詞耳。」所見與蓴客暗合。
御覽四百七十引晉中興書曰:「諸葛氏之先,出自葛國。漢司隸校尉諸葛豐以忠強立名,子孫代居二千石。三國之興,蜀有丞相亮,吳有大將軍瑾,魏有司空誕,名並蓋海內,為天下盛族。」 全祖望鮚埼亭集外編二十八書諸葛氏家譜後曰:「方遜志謂『諸葛兄弟三人,才氣雖不相類,皆人豪也。當司馬昭僭竊之時,征東拒賈充之言,起兵討之,事雖無成,身不失為忠義。豈非大丈夫乎?世俗乃以是訾之,謂「漢得龍,吳得虎,魏得狗」,為斯言者,必賈充之徒。揚雄所謂「舍其沐猴,而謂人沐猴者」』,善哉斯言!予觀東漢之末,東南淑氣萃於諸葛一門。觀其兄弟分居三國,世莫有以為猜者,非大英雄不能。厥後各以功名忠孝表著,而又皆有令嗣,何多材也!
혼란기 분열기는 영웅이 할거하는 시대다. 후한 왕조가 해체하면서 개막하는 군웅할거 시대에 천하제패를 꿈꾸는 이가 우후죽순으로 나타났고, 시간이 좀 지나자 위촉오魏蜀吳 삼국이 정립鼎立하는 시대로 굳어졌고, 그것이 지나자 다시 서진西晉이 등장해 천하를 제패했다.
하지만 이조차 오래가지 아니해서 이윽고 다시 분열하고는 그 전보다 더 극심한 분열기가 개막했으니, 오호십육국시대가 그것이다.
중앙과 지방은 언제나 길항이 있다. 중앙은 어케든 지방을 통제하려 하지만, 지방은 그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열망이 들끓기 마련이다. 당연히 중앙이 힘이 넘칠 적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가 관철하지만, 그것이 틈만 보이면 지방은 독립해 나갔다.
그러는 와중에 한 집안에서도 각기 꿈을 좇아 다른 길을 걷기도 하는데, 지금의 산동성 낭야琅邪에 터전을 둔 갈씨葛氏 형제들이 공교롭게도 삼국으로 고루 흩어졌다. 이 낭야라는 데가 실로 묘한 곳인데, 붕괴한 晉왕조를 중흥한 성씨 주축이 바로 王씨라, 왕도王導가 주도한 이 성씨를 낭야왕씨琅邪王氏라 한다.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는 바로 이 낭야왕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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