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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學館, 대정 천황 내탕금으로 비롯한 한국과학의 효시

by taeshik.kim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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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기념과학관



2) 은사기념과학관


1925년(大正 14) 5월 10일 다이쇼大正 천황 성혼成婚 25주년 기념 축전을 거행하는 때를 맞아 사회교육을 장려한다는 취지로 내탕금 17만 원이 하사되었다.

이를 주요 재원으로 설비비에 충당하고 경상비는 국고 보조(첫해 보조 예산 5만 원)를 받아, 왜성대倭城臺 구舊 총독부 청사를 이용해 1926년(大正 15) 1월 은사기념과학관을 창립하고 1927년(昭和 2) 5월 10일부터 개관했다. [515]

은사기념과학관은 재단법인 조선교육회 교화부의 사업으로 이를 경영하게 하여 널리 내외의 교화 자료를 수집하고 현대 문화의 축도縮圖를 일목요연하게 드러내고, 실지로 문명의 혜택을 평이하고 간명하게 전달시키며, 민중의 과학적 상식을 계몽·배양하고, 이용후생이 과학에 근거해 왔음을 이해시키며, 산업의 진흥·국부의 증진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했다.


훗날 은사기념과학관이 되는 구 조선총독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제반 과학(문학·정치학· 전문의학에 속하는 것은 제외한다)에 걸쳐 생활에 필수적인 것과 산업에 관한 것을 망라해서, 그 원리와 동작의 실제를 실물·표본·모형으로 자세히 가르칠 수 있도록 설비하고 진열 품목을 14개 종류로 나누었다.

그리하여 은사기념과학관은 우리나라 과학박물관의 효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쿄과학박물관과 함께 우리나라의 저명한 2대 과학박물관이 되었다.

또한 과학관 부대사업으로 강연, 영화, 지방 순회강연, 인쇄 선전, 전람회, 부인의 날, 어린이의 날 등을 특별히 개설하고, 공사公私 제반 기관과 연락을 도모해 시운의 진전에 유의하면서 실험·견학 등 적절한 활동적 사업을 통해 사회 교화의 실적을 폭 넓게

484쪽 국의 조선총독부30년사 상권(1-3기) 제3기 사이토 총독 시대

거두고 있다.

은사기념과학관은 목조 2층 건물, 총면적 1,104평, 진열장 529평 외에 약 55평의 강연실로 이루어져 있다. (이상 485쪽)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상), 박찬승·김민석·최은진·양지혜 역주 | 민속원 | 2018년 10월 23일. 

 
***
 
이 은사기념과학관이 구 총독부 청사가 비워지자 바로 들어가지는 않은 듯하다. 그것은 동 시정 25년사 다음과 같은 증언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상품진열관은 1925년(大正 14) 12월 총독부가 현재의 신청사 낙성에 따라 이전한 것을 기회로 왜성대 구 청사를 개축·충당充用했는데, 그 위치가 높은 언덕이고 시가지 중심부에서 떨어져 기능을 발휘하기에 유감스러운 점이 적지 않았다. 

이에 총 공사비 24만 원(이 중 약 7만 원은 민간에서 물건 기부)으로 경성부 내 요충 지점인 남대문 서쪽으로 신축·이전하게 되어, 1928년(昭和 3) 11월 기공해 1929년(昭和 4) 8월 준공되었다.

해당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 근세近世 자유형自由型 4층 건물로, 총 평수는 846평 이다. 모든 설비가 잘 정돈되어 조선의 물산을 소개하기에 거의 유감이 없을 정도에 달했다. 또한 관내에 내지 참고품 진열장을 설치했다. 그해 10월 이 곳으로 이전하고, 명칭을 ‘조선총독부 상공장려관’으로 바꾸었다. (동 527~28쪽) 

 
이로 보아 구 총독부 청사는 비움과 동시에 잠깐 총독부 상품진열관으로 썼음을 본다. 

이 은사과학기념관은 그 등장 맥락과 그것이 끼친 영향력 등을 고려할 때 적지 않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어야 하나, 일본이라면 덮어놓고 악마화해야 하는 그 논리 인식 때문인지 아래 정인경 외에는 전업적 분석이 없다. 

나아가 이 은사과학과학기념관은 한반도 최초의 과학전문박물관이라는 사실이 대서특필되어야 한다.

더불어 저 박물관은 총독관저가 경복궁으로 신축 이전되면서 남산 기슭 옛 총독관저를 재활용했다는 점도 대서특필이 필요하다.

그런 까닭에 저 은사과학관은 박물관 영역에서도 아주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한다. 현실은? 꽝이다. 저런 박물관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나아가 박물관으로서의 이 기념관은 재원 혹은 건립 과정이 철저한 국립이지만, 막상 그 운영은 재단법인 조선교육회 교화부가 맡았다는 점에서 국립박물관의 민간 위탁경영이라는 형식을 띤다는 사실도 대서특필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중대성은 모조리 누락한 채 예서도 그 빌어먹을 식민지배 논리 어쩌고 하는 삼천포로 흘렀다.

식민지시대 연구는 악마화한 일본이 배경에 깔리지 않으면 암것도 안 된다는 암묵이 있다. 


 
정인경, 「은사기념과학관과 식민지 과학기술」, 『과학기술학연구』10, 한국과학기술학회, 2005
 
1. 서론
2. 은사기념과학관의 설립과 식민지 과학관의 역할
3. 과학관과 식민지 지배이데올로기의 결합
4. 전시체제의 과학동원(科學動員)
5. 결론적 고찰; 식민지 과학관의 정치성
참고문헌

 
ABSTRACT
이 글은 일제에 의해 이식된 은사기념과학관의 사회적 역할을 살펴보았다. 식민지 과학관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일제는 과학사상을 보급한다는 미명아래 과학관을 식민지 지배에 이용하였던 것이다. 식민지 과학관은 ‘위대한 과학제국’ 일본을 부각시켜 열등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과학관의 전시와 강연, 실험, 과학영화 등은 이러한 식민지 지배이데올로기를 선전하였다. 


식민지 과학관의 이식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낳았다. 첫째, 과학관이 정치권력의 선전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식민지 과학관의 건축, 전시, 운영의 모든 면이 공공연하게 권력의 정책방향을 선전, 옹호하고 그것이 ‘개발’, ‘발전’이라는 장미빛 환상을 심었다. 둘째, 식민지 과학관에서 과학기술은 ‘결과’와 ‘도구’로 취급되었다. 일제는 과학이 사회적 위기를 해결했던 역사적, 문화적 산물임을 부정하고 ‘도구적 합리성’만을 주입시켰다. 셋째, 식민지 과학관에서 다루었던 과학기술은 매우 수준 낮은 것이었다. 생활의 과학화를 내세우며 교육했던 것은 근대적 규율을 내연화시켜 권력이 요구하는 노동자형 인간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단행본 중에서는 동아일보 과학전문기자 출신 홍대길이 쓴 과학관의 탄생(지식의날개, 2021)이 은사기념과학관의 설립 이유를 관동대지진과 연결해 설명한다. (선행연구 성과 부문은 안중근기념관 이주화 선생 도움이 있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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