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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인간 심연을 후벼파는 죽음의 공포, 이현운의 경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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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한 장면 캡처

 
임금을 시해하고 권력을 잡은 강조를 고려사 편찬자들은 당연히 반역叛逆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그의 충절은 높이 살 만했으니,  통주성通州城 남쪽 전투 현장에서 거란군에 사로잡힌 그는 투항하라는 거란군주 야율융서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앉힌 강조는 그것을 구실로 토벌을 앞세운 거란 40만 대군을 맞아, 30만 대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자 당시 고려 조정 최고 실권자로서 직접 전장에 뛰어든다.

보통 최고 권력자는 최전선에 나서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우는 데 견주어 그 자신이 직접 나섰다는 점이 이채롭다. 

다만 이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어처구니 없는 판단 미스로 그 자신이 사로잡히는 신세가 됐다는 점에서 그는 지장智將이라 볼 수는 없으며, 우직한 군인이라는 인상을 짙게 한다. 

초반 몇 번 싸움에서 이기자 거만해진 그는 대비를 게을리한 채 진중에서 한가하게 바둑이나 두다가 거란 선봉장 야율분노耶律盆奴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가 이끄는 거란군 내습에 다른 고려군 주요 수뇌부와 함께 같이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거니와,

고려사와 그 절요는

[契]丹人以氈裹兆

라 했으니, 이는 거란 군사들이 강조를 氈 속에다가 담아 갔다는 뜻이다. '전'이라 읽는 이 글자 '氈'은 간단히 말해 카페트다.

주로 북방 민족 이야기를 논할 때 자주 만나는 말인데, 양털 같은 것으로 짠 모직물을 말한다. 이들이 왜 이런 전쟁통에 저런 카페트를 들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용도였다. 
 

드라마 한 장면 캡처

 
고려사절요 권 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1년 11월 조를 보면, 쿠데타 토벌을 명분으로 내걸고 고려를 침공한 야율융서 성종은 물론 통역을 통해서 했겠지마는 

“汝爲我臣乎” 

라고 묻는다. 너는 내 신하게 되겠느냐? 는 뜻이다. 

이럴 때 보통은 다 넘어간다. 녜 잘 봐주십시오 하면 그걸로 용서 받고 그 자리에서 장군으로 책봉된다. 

하지만 강조는 거부한다.

“나는 고려 사람이다. 어찌 다시 네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했다. 재차 물었으나 대답은 처음과 같았고, 다시 살을 찢으며 물었으나 대답은 또한 처음과 같았다.

고려거란전쟁 드라마는 분노한 야율융서가 자신의 부월로 직접 자기 얼굴에 피를 튀기며 찍어 죽인 것으로 설정했지만, 황제는 그런 짓 하지 않는다. 

그렇게 강조는 끝까지 절개를 지키며 비참하게 죽어갔다. 
 

드라마 한 장면 캡처

 
그와 대비하는 길을 걸은 이가 이현운李鉉雲.

그는 강조가 주도한 막부 쿠데타에서 강조와 함께하며 새로운 권력에 진입한 인물이다. 현종 즉위와 더불어 중대사中臺使에 임명된 그 막부 체제에서 그는 쿠데타 정권 넘버 투인 중대부사中臺副使가 되었으며 이 전쟁에서는 강조 바로 아래 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事로 출전했지만 같이 사로잡혔다. 

같은 회유 공작에 이현운은 냉큼 거란 품에 안긴다. 내 신하가 되겠느냐는 물음에 이현운은

“兩眼已瞻新日月, 一心何憶舊山川.”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을 드라마는 그대로 써 먹었으니, 제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으니, 하나의 심장으로 어찌 옛 산과 들을 생각하겠습니까?

라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새로운 태양 야율융서를 뵙게 되었으니, 어찌 고려 왕 따위를 다시 섬기겠느냐는 의미다.

이 장면을 보고는 결박에서 풀려난 상태이던 강조는 이현운을 발길로 걷어차면서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그 따위로 씨부렁거린단 말인가” 라고 했다 한다.

강조는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그것도 장렬하게 절의를 지켰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만큼 인간 본연을 처절하게 드러내는 일 없다.

이현운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법한 선택을, 좀 더 멋지게, 좀 더 간사스럽게 했을 뿐이다. 

목숨 앞에서는 애미애비도 처첩자식도 버리는 법이다.

 

***

 

저리 외치며 냉큼 거란과 야율융서 품에 안긴 이현운을 

21세기 대한민국인은 변절자요 민족의 배신자라 갖은 비난을 퍼붓겠지만, 

저 지경이 되어 죽음을 선택할 대한국인은 몇 명이겠는가?

만 명 중 한 명도 되지 않는다. 

이 만 명 중 한 명의 시각으로 9천999명을 희생하는 역사를 혹 지금의 우리는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배신 #변절 #의리 #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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