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사는 잡곡문명에 대한 이해가 없다.
물론 잡곡농경에 대한 이야기는 한다.
필자가 이야기 하는 것은 완결된 형태로서의 잡곡문명,
도작이 없는 상태에서도 번영하는 잡곡 문명에 대한 이해가 우리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잡곡농경에 대한 이야기는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도작의 보조적 수단이나
도작이 들어오기 전 원시적 농경으로서의 이야기지,
잡곡농경만으로 이루어진 완성체로서의 문명을 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황하문명은 잡곡농경만으로 굴기한 문명이다.
소위 요하문명도 그렇다.
한국사 벽두를 장식하는 비파형동검 등 초기 청동기문명-.
모두 완성된 형태의 잡곡농경에 기반한 것이다.
부여, 고구려?
마찬가지다. 이들은 한반도 진입 때까지 쌀은 구경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잡곡농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한국사의 북쪽 절반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며
한국사 벽두의 문명의 기원에 대한 이해도 불가능해진다.
도작은 잡곡문명보다 훨씬 뒷시대에 들어왔으며
한번 들어온 다음에는 한반도 중 남부 일대에서만 성행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라가 통일 후 대동강-원산만 선에서 북진을 멈추었다고 분개하지만
사실 신라가 왜 그 선에서 멈추었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신라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잡곡문명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며
그것이 진흥왕의 동해안 북진을 황초령-마운령 선에서 멈추게 한 가장 큰 이유였을 가능성이 높다.
잡곡문명은 도작의 보조적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 완성된 형태로서
도작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습속, 생계구조, 풍습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병도 선생은 한국사의 벽두를 후방계열, 남방계열, 서북계열로 나누었는데
이렇게 나누어진 계열의 바닥에는 잡곡농경과 도작 농경, 그리고 혼합농경의 차이가 있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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