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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장영실, 과학에 주린 국민국가 대한민국의 호명

by taeshik.kim 202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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흝으니 장영실은..

아비가 지금의 절강 혹은 복건 일대 출신 테크노크랏으로 아마도 고려말 혼란기를 틈타 조선에 정착했으며, 조선에서 그를 붙잡아 두고자 관기를 아내로 주었다.

이를 발판으로 장영실 역시 특히 광물학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동래현 소속 관노로 있다가 태종 시대에 중앙에 발탁되어 상경한다.

 

물시계 자격루 물통 물대롱. 국립고궁박물관 과학실

 



그가 죽 관적을 둔 분야는 군대였으니 이는 아마도 광물을 만지는 일이 무기 제조와도 밀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방원에게 굄을 받은 그는 세종한테도 총애를 얻어 때론 내시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그가 벼락 출세한 사건은 익히 알려졌듯이 자격루 제작이다.

자격루는 세종 자신이 직접 도안 설계했다. 하지만 이 설계를 구상으로 해체하는 일은 장영실이 담당했다.

따라서 자격루 제작 절반의 공로는 장영실이 맞다.

이를 발판으로 그 얼마 뒤엔 역시 세종의 입안인 흠경각을 완성함으로써 장영실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질시도 있었을 터. 그가 감독한 임금의 수레가 고장 난 일을 계기로 탄핵을 받아 곤장 육십대를 얻어맞고는 모든 직책이 회수되어 외방에 내쳐짐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자격루 부품



그를 근대 과학의 비조로 호명한 이는 국민국가 대한민국이다.

실상을 뒤척이면 그가 뉴턴이나 케플러가 될 수는 없다.

그는 광물에 조예가 깊은 광산 채굴업자요 시계 제조업자인 테크노크랏이었다.

근대 서구의 압도적 힘에 밀린 동아시아는 그에 맞설 자생적 과학의 흔적을 찾아헤매다가 마침내 세종을 발견하곤 그에서 매몰한 장영실을 위대한 과학자로 호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장영실의 유산이 결코 의미가 없거나 작은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져야할 몫은 그가 져야한 전근대 과학의 아버지라는 짐을 벗겨주는 일이다.

(2016.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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