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에서 전주이씨가 경상도에 드문 이유는
조선왕조 개창 이후 전주이씨의 종친이 확산하는 과정에서
과전법 체제를 타고 퍼져나간 까닭이 아닐까
생각 혹은 의심한 바 있었다.
과전법 체제에서는
왕자, 왕의 형제, 왕의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伯叔]로, 대군大君에 봉한 자는 300결, 군君에 봉한 자는 200결을 지급했다. 그리고 부마로서 공주의 남편[駙馬尙公主者]은 250결, 옹주의 남편은 150결을 지급하였으며, 그밖의 종친도 등급에 따라 각각 차등 있게 지급했다
라고 했다.
이 땅이 얼마나 넓은가 하면,
과전법 체제에서 관료의 경우 가장 넓은 땅을 받은 이가 150결이었다.
따라서 대군, 군, 부마, 옹주만 해도 관료 중 최고등급 관료와 동일하거나 두배 가까운 땅을 받은 셈이다.
조선시대에 1결이 대개 가로 세로 100미터 정도되는 땅이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차이는 있었다)
300결이면 얼마나 넓은 땅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경기도를 위주로 분급하던 과전이 모자라면
하삼도로 과전이 내려갔을 것인 바, 어떤 땅을 과전으로 지급했을까?
당연히 왕조교체기에 조선왕실 수중으로 떨어진 땅,
고려왕실 소유의 땅이 그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가정이 용납된다면
저 전주이씨 분포는 결국 고려왕조 당시 왕실 소유 땅의 분포를 반영할 수 있을 것일 수도 있겠다.
물론 왕실 이외 종족이 왕조 교체 과정에서 땅을 잃은 경우도 있을까 싶지만,
여말선초 때 실제로 몰락한 종족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적었던 것을 감안하면
(너도 나도 고려말 절개를 지켰다고 하지만 사실 왕조를 지키다 죽은 사람은 몇 안 된다)
저 왕실 소유의 땅은 거의가 고려왕실에서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있을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이 용납된다면,
왜 고려왕실은 경상도에 땅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필자가 억측을 해보자면,
후삼국 통일기에 신라의 경순왕을 비롯해서,
영남 쪽 많은 호족이 고려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고려 개국 이후도 이 지역 호족들은 거의 자기 땅을 잃지 않았고,
고려왕실로 귀속된 것은 후백제 치하 땅과
경기 일원 땅이 주가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거란 침공 때 고려 현종이
나주로 몽진해 간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를 고려개국 이래 나주의 호족과의 관계로 설명하는 경우를 보는데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실제로 후삼국 통일 후 후백제 왕실 소유 땅이 고려로 귀속되었다면
당연히 고려 왕실 땅은 구 후백제 령에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고려시대 전시과제도에 분급한 전지 시지와
과전법 제도하에서 분급한 땅은 서로 겹칠 가능성이 있고,
이 두제도에서 상대적으로 경상도는 한걸음 떨어져 있었던 바,
그것이 조선시대 내내 이 지역이 중앙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한 근본적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정초부터 필자가 생각해본 억측이다.
독자 여러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빈다.
영남권이 현격히 낮은 전주이씨 분포
영남권이 현격히 낮은 전주이씨 분포
우리나라 본관별 분포가 국세조사 통계로 제공된다. 여기 보면 전주이씨 분포가 있는데 이 분포도를 보면 생각해야 할 부분이 매우 많다. 전주이씨 분포는 서울과 호서일대를 기반으로 전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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