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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제사 한방에 무너진 초기 천주교 창립자들

by 초야잠필 2023.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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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 천주교의 창립자들에게 있어 가장 문제점은 바로 '제사문제'였다. 

필자가 보기에는 정약용, 이승훈, 이벽 등 이른바 한국 천주교의 창립자들은 

본질적으로 성리학자들이다. 이들은 성리학자로서 천주학에 발을 담근 것이지, 

성리학을 버리고 천주학으로 개종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초기 천주교의 창립자들에 있어 천주학 자체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은 정황이 여럿 보이는데, 

1. 우선, 이들은 기독교 자체에 대한 이해도 피상적이고 깊지 않았지만, 기독교의 일파인 천주교에 있어 교황수장권과 사도전승에 대해서는 거의 이해가 없었다.

앞에 쓴 것 처럼 이들의 "천주교"는 범기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것이 더 맞는 것이 아닐까 싶으며 아마도 기독교가 여러 종파로 개신교는 전혀 다른 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았다면 아마도 "초기 교회"의 운명은 상당히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2. 이러한 낮은 인식수준은 기독교 교리가 보다 명확해지면서 천주교를 성리학에 대한 보완적 시각에서 접근하던 조선의 성리학자 출신 "천주교도"들은 크게 흔들렸다.

이승훈, 이벽 등이 가장 흔들린 것은 천주교가 "제사를 배격"한다고 알려지면서 부터이다. 이승훈과 이벽의 배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것은 제사문제였다.

아마도 다른 초기 "천주학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계속 신앙을 유지한 것은 사대부가 아니라 중하층민 출신들이었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하는 바가 크다. 

짧게 다시 요약해 보면-. 

한국의 천주교사에서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초기 역사는 매우 복잡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조선 땅에서 그 이전에는 만난 적이 없었던 유학과 기독교라는 두개의 사상 체계가 최초로 조우한 시기인데, 

이 조우에 관련하여 벌어진 사건들은 단순히 천주교 창립의 프롤로그 정도로 기술해서는 그 다면성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초기 천주교도들의 배교는 한국천주교의 입장에서만 해석하게 놔둬서는 그 정황을 확실히 밝히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유교, 성리학자들이었고 그 시각에서 천주교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은 이들이 죽을 때까지도 아마 바뀌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은데, 

천주교가 창립시기와는 달리 발전단계에서는 성리학자들이 아니라 더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주도하게 되었다는 점은, 

비로소 이 종교가 조선에서 성리학의 보완재로서가 아니라 종교로서 재정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천진암 강학을 주도하여 사실상 한국 천주교의 불씨를 당긴 이벽. 하지만 그의 말년 역시 다른 초기 천주학 관련자처럼 배교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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