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족보 이야기

족보의 구조, 성립사가 중요하다

by 신동훈 識 2026. 2. 4.
반응형

족보는 개인이 무슨 벼슬을 했고 이런 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날조일 수도 있고 과장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족보에서는 이런 개별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대동보 성립의 과정, 

그리고 족보 전체의 구조이다. 

대동보는 그 성립과정을 수백년에 걸쳐 추적하면, 

그 집안 족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성립하였는지 비교적 상세히 규명이 가능한데 

(물론 이것도 17세기 부터 정기적으로 족보가 편찬된 집안의 경우이다)

이 족보의 성립과정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고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족보에서 서자라는 이름이 빠져 나가는 과정은

당시 기록, 일기 등에도 관련 사항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어떤 문중 족보를 보면 통채로 그 구성원이 동일한 집안으로생각 하지만 

필자가 누차 여기에 썼듯이 아무리 잘나가는 집안의 족보라도 

그 안에는 정말 명문 반가가 있고, 

서얼도 있고, 평민도 있고, 노비나 다름없는 사람들도 뒤섞여 있어 

이 족보에 실려있다는 것이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을 전혀 보장해 주지 못한다. 

요즘으로 치자면 대통령 장관부터 빈민까지 모두 들어가 있는 것이 대동보라 

족보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족보 전체의 구조이지 개개인의 생활사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도 유효한 "문중"은 

이 족보에 실린 사람들 전체를 묶은 집단이 아니었다. 

이 "족보"안에는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들과 이에 눈치를 보는 사람들, 

그리고 이 족보에 한번 끼어 들어가 볼까 하며 시도하는 사람들, 

수많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사회적 배경의 사람들이 하나의 족보에 묶인 것은

우리가 그야말로 전근대적이라고 매도하는 부계 계보, 

모계는 빼버리고 부계만 간추린 족보가 출현하면서 부터였다고 할 수 있겠다. 

가부장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부계족보가 완성되면서

비로소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하나의 족보안에 묶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부계 족보의 성립이 우리 생각과는 달리 

출현한 처음부터 근대적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선전씨 대동보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