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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는 구리가 넉넉하지 않았을 만큼,
고물 청동은 녹여 다른 기물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썼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구리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바꾸어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청동기시대에는 위세품으로 동검이나 거울의 모습으로 이용되었겠지만,
불교의 시대가 열리자 이전의 위세품들은 고물로 취급되어 절의 불상이나 동종, 기물들로 모습을 바꾸었을 것이다.
조선시대가 되어 억불이 되자 이번에는 절의 기물들이 줄줄이 녹여져 놋그릇이 되거나,
화폐경제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상평통보로 모습을 바꾸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통용한 상평통보에는 청동기시대에 동검이나 거울이었던 것이 불상이 되었다가 마침내 사람들이 쓰는 돈으로 모습을 바꾼 것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단계가 상평통보가 되어 버린 것도 상당히 의미가 있는 이야기다.
자본주의 시대를 예고했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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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형동검이 수 백개는 녹아 들어갔을 성덕대왕신종
*** Editor's Note ***
구리가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녹는 점이 1,058도인가밖에 되지 않아서였으니, 그래도 휘발하지 아니하고 다른 기물로 주물이 가능한 까닭이었다.
금속 자체가 귀한 그 시절, 아궁이 불만으로도 녹이기가 가능한 구리의 이런 특성이야말로 구리 선호도를 높인 절대의 조건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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