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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진경대사 보월의 절대 나와바리, 뭔가 아리숑숑한 창원 봉림사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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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사지 7차 자문회의-2(6.13).pdf
6.85MB

 

 

 

경남 창원시가 봉림동 165번지 일원 1,860㎡(발굴조사 1,200㎡, 시굴조사 660㎡) 봉림사지(도기념물 제127호) 7차 발굴조사를 벌인 모양이라, 실제 조사는 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라는 데서 맡았으니  

조사기간은 2023. 01. 16. ~ 2023. 07. 14인데 실조사일수가 29일이라는 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슨 곡절이 있지 않나 한다. 

봉림사는 라말여초 불교계를 장악한 선종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선문 본거지인 사찰로 그 원수에 해당하는 대경대사 보월의 능공탑(보물)과 그 탑비(보물)가 현재 느닷없이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는가 하면, 삼층석탑(경남 유형문화재)은 창원시 상북초등학교에 이전되어 있는 상황이라, 어쩌다 이 모양인지 알 수는 없거니와 

 

이거이 기존 가야문화재연구소 조사 성과인데, 곶감 알맹이 빼먹듯이 쏙쏙 빼먹었다. 뭔가 이상하다. 방향성이 안 맞는다. 이걸로 보면 금당은 제2 건물지 혹은 제5, 5 건물지 어간에  있어야 할 듯한데 뭐 우찌된 건가? 석탑 자리도 안 맞는다.

 

기존 명문와 탁본인데 A형식은 뭐고 B형식은 또 뭐냐? 고고학은 이 짓 안 하면 굶나?

 

그런 봉림사에 대한 탐구 일환으로 1995년 이래 1998년까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금당과 탑이 있던 자리를 확인하고 ‘봉림사’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 유물까지 수습하는 성과를 내기는 했지만 사역 전모를 확인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이에 창원시에서는 봉림사지 보존과 정비계획 수립을 위해 2021년(5차)부터 2023년(7차)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중이니, 

그 조사 목적으로

- 체계적인 학술조사를 통해 봉림사의 불교사적 위상 재정립
- 봉림사지 보존과 정비계획 수립의 근거 확보
- 창원시민에게 봉림사지의 가치 공유 및 향유 기회 제공

을 표방했으니, 저런 목적이랑 발굴조사가 솔까 직접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나는 의심하거니와 아무튼 그렇게 해서 팠더니 

 

이번에 조사한 구역을 보면 기존 발굴지점을 기준으로 서북쪽에 기울어져 있음을 본다.

 

진경대사보월능공탑이 있던 탑비전 터로 추정되는 구조물을 확인했고

탑비전지 존재가 드러나면서 주변 건물지 성격이 구체화하고 라말여초기의 가람배치 또한 분명해졌으니 

곧, 탑비전지 북쪽 6호 건물지는 조사당으로 추정되며 2호 건물지는 방과 욕실을 갖춘 승방일 가능성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편 

전체 조사가 아니라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봉림사는 고려시대가 전성기였고, 두 차례 이상 수∙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거니와 

 

뭔지 모르겠다. 뒤죽박죽인 듯하다.
삼층석탑 있던 자리?
부도전? 부도전이 대체 뭐야? 부도전이라면 부도를 감싼 건물이라는 뜻인데 대체 이런 개념은 누가 언제 만들어낸 거임? 무슨 부도를 건물로 감싼단 말인가? 진경대사 부도탑이 있던 자리라는 말인가?

 

역시 단정은 어려우나 그 창건 시기에는 탑비전지와 북쪽 남향 건물지를 중심으로 봉림사가 운영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홍수로 탑비전지 주변 사역이 피해를 보자 동쪽 기존 축대를 밖으로 물려서 쌓고 대지를 조성한 후 안전한 상단으로 탑비전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하며 

온돌과 아귀통 등 부속물을 갖춘 대형 건물지, 연약 지반을 보완하기 위한 대지 전면 적심 등 건물지 구조와 축조기법이 구체적으로 드러났으니 

습한 지형을 보완하기 위한 중심 배수로와 보도의 설치, 홍수 피해 후에는 축대와 대지 조성으로 안전성을 확보해 가며 사찰을 운영해 간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고 한다.  

청자 잔대, 앵무문 청자대접, 철화분청병 등 고급 청자는 봉림사 선승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고 한다. 

 

정리하면

봉림사지 가람배치 변화의 원인과 과정 확인
산지에 입지한 선종 사찰로서 봉림사의 구조와 성격이 보다 명확해짐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전지로 추정되는 구조물 확인

이를 최고 성과로 꼽는다. 

다만 며칠 전 개최한 자문회의에서 부도전지는 탑비전지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개진됐다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도전 조사당 탑비전 등등 용어를 남발 혼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부도전이라는 말은 없다! 이건 현대 고고학 고건축이 지들 맘대로 만들어냈을 뿐, 조사당이다. 

이 조사당은 해당 사찰을 있게 한 원훈대신이나, 그것을 중창한 왕사 국사 같은 중시조를 별도로 봉안하는 사찰 안의 또 하나의 사찰, 곧 사내사寺內寺로서, 그 사내사 구성은 실은 전체 사찰의 축소판이라, 대웅전에 해당하는 공간을 마련하고는 그에다가 해당 조사 혹은 중창주 화상이나 조상을 봉안하며, 그 전면에다가는 그 승탑과 탑비를 두며, 또 그 양측으로는 회랑식 건물을 둔다. 

 

봉림사에 대해서는 
『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昌原都護府


• 山川條 – 鳳林山 在府南十五里
• 佛宇條 – 鳳林寺 在鳳林山 有新羅執事侍郞崔仁渷 撰僧眞鏡塔碑
『慶尙道邑誌』 昌原
• 佛宇條 – 鳳林寺 在鳳林山 有新羅執事侍郞崔仁渷 撰僧眞鏡塔碑 壬亂折傷不能記. 今無
『輿地圖書』 慶尙道, 金海鎭管昌原大都護府
• 寺刹 – 鳳林寺 在鳳林山 有新羅執事侍郞崔仁渷 撰僧眞鏡塔碑

라 해서 보이며, 

진경대사탑비에 기록된 진경대사 심희의 행적을 정리하면 

• 任那의 왕족 출신으로 김유신(흥무대왕)의 후손
• 862년(경문왕 2년) 혜목산 원감대사 현욱에게 출가
• 872년(경문왕 12년) 구족계를 받음
• 907년~911년
- 知金海府 進禮城 諸軍事 金仁匡의 禪門歸依 및 三寶修理
- 김해 서쪽에 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진례성제군사 金律熙의 후원 받음
- 띠집을 수리하여 鳳林으로 고치고 선방을 중건함
• 923년(경명왕 7년) 4월 24일 입적하자 왕이 조문하고 시호(眞鏡大師)와 탑호(寶月凌空之塔)를 내림
• 924년(경명왕 8넌) 4월 1일 탑비 건립

고 했다. 

근대기에는 백용성 조사 관련한 사적이 있으니   

1919년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인물로 4번째 서명한 그가 1927년에 경남 함양군 백전면에 화과원을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대각교 창설했으니  

그의 遺訓十事目 중 봉림사지를 가야불교 초전법륜 성지로 잘 가꾸라는 유훈이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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