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묘사靈廟寺라는 사찰은 신라 중고기에 그 도읍 계림에 건설된 거찰巨刹 중 하나요,
그 이름이 매우 특이하며, 다른 사찰에 견주어 여성 색채가 짙게 풍긴다는 점에서 대서특필해야 한다.
위선 그 위치와 관련해서는 근자 고고학 발굴을 통해 어느 정도 확정이 되었으니,
지금 경주 분지 한복판에 흥륜사라는 사찰임이 실상 결판났다.
나아가 그것이 등장한 시점 또한 명확해서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선덕왕 조에 의하면 그 재위 4년(635) 에 낙성했다고 한다.
이름은 영묘사靈廟寺가 일반적이지만 그 이칭으로서, 아마 미화하려 한 듯한데 신라 경덕왕 17년, 758년 건립한 김천 갈항사 석탑기葛項寺石塔記에 의하면 언적言寂 법사를 일러 영묘사零妙寺로 귀속케 하니, 이 영묘사가 저 영묘사임은 명확하다 하겠다.
둘 다 짙는 귀신 냄새를 풍기는 표현이다.
이는 곧 영묘사가 다른 사찰에 견주어 유별나게도 사당 혹은 종묘 느낌이 강한 곳임을 암시한다 하겠다.
신라 사회, 특히 그 최중심 계림을 밤하늘 별처럼 수놓은 절 중에서도 영묘사가 차지하는 막강 위상은 후세 관념 투영이기는 하겠지만, 신라 왕국을 대표하는 7개 거찰, 곧 7처 가람 중 한 곳으로 당당히 꼽혔다는 점에서도 여실히 확인한다.
삼국유사 권 제3 흥법興法 제3 아도기라阿道基羅 이야기에 의하면 불교가 신라에 전래한 뒤 그 땅에 불교를 크게 일으킬 7곳으로
천경림天鏡林 흥륜사興輪寺와 삼천기三川歧 자리 영흥사永興寺, 용궁龍宮 자리 황룡사皇龍寺, 그 북쪽 분황사芬皇寺. 사천미沙川尾 자리 영묘사靈妙寺, 신유림神遊林 자리 천왕사天王寺, 서청전婿請田 자리 담엄사曇嚴寺가 그곳이다.
이 영묘사가 여성 색채가 더욱 짙다 함은 무슨 근거인가?
위선 이름이다. 이 령묘靈廟라는 말이 짙은 섹솔로오지 색채가 있다.
실제로 드러나는 면모도 그러해서 삼국유사가 저록한 그 유명한 선덕여왕 지기삼사知幾三事, 곧 선덕여왕이 생전에 그 낌새를 미리 알아채고 대비한 사건 세 가지 중 하나의 무대로 영묘사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이 미리 낌새를 알아차린 세 가지 사건은 무엇인가?
그 지기삼사 내역을 보면 첫째가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홍색·자색·백색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더불어 그 씨 석 되를 보내오자 그 의미를 알아차린 일이고,
둘째는 영묘사靈廟寺라는 지금의 경주 지역 사찰 옥문지玉門池라는 연못에서 겨울임에도 개구리가 떼지어 울어대자 그것이 백제의 내침에 대한 예고 혹은 경고임을 알았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옥문지가 뭔가? 옥문이 뭔가? 여성의 성기다. 자궁이다.
나아가 영묘사는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이야기 주무대임을 주목하거니와,
이에 의하면 진지왕 시대 흥륜사興輪寺 승려 진자眞慈가 당堂 주인 미륵이 항상 미륵선화, 곧 화랑으로 발현하기를 원하다가 그를 마침내 알현하니 그곳이 바로 영묘사 근처였다 한다.
이 이야기는 화랑세기를 통해 마침내 비밀을 폭로했으니, 이 미륵선화가 바로 화랑이 폐지되었다가 원화로 부활하고 그런 원화가 다시 폐지되어 화랑으로 등극하는 설원랑(설화랑)이며, 저 미시가 곧 미실임이 드러난 것이다.
왜 삼국유사는 이 이야기 무대를 영묘사를 삼았는가? 당대 권력을 주름잡은 미실이 은퇴 퇴거하고 말년을 보낸 데가 바로 영묘사인 까닭이다.
그 은퇴 퇴거한 미실을 따라 설화랑은 영묘사로 들어가 미실이 죽자 뒤따라 죽었다.
곧 영묘사는 왕실 여성 어른이 은퇴 퇴거하여 말년을 보내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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