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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덩치가 크다는 신라 영묘사 안방 금당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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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이 보이는 이 경주분지 지도에서 경주공고 자리랑 흥륜사 자리를 주목해 주기 바란다.

저 두 자리에 각각 신라 중고기를 대표하는 신라시대 거찰巨刹 흥륜사興輪寺와 영묘사靈廟寺가 있던 곳임이 거의 굳어진 형국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라시대 기준 흥륜사는 지금의 경주공고 자리에, 영묘사는 지금의 흥륜사라는 사찰이 자리잡은 곳에 있었다. 

예서 조심해야 할 사찰은 흥륜사. 지금 그 이름을 쓰는 흥륜사는 흥륜사 본래 자리가 아니다. 영묘사 자리다.

이는 저 두 곳에서 각기 출토하는 글자 새김 기와를 통해 거의 정설로 확립된 상황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흥륜사 일대에서 영묘사라는 글자가 적히 기와가 쏟아져 나온 반면, 흥륜사라는 이름을 새긴 기와는 경주공고 자리에서 쏟아져 나왔다. 

문제는 두 곳 모두 사정이 저래서 발굴이 쉽지 않다는 점. 경주공고 자리는 찔끔 발굴이 있었을 뿐이라서 정확히 그 사역寺域 배치양상을 알 수 없고, 흥륜사 일대 또한 도로가 지나고 새로운 사찰이 들어선 관계로 쉽지는 않다. 
 



그러다가 작년에 사정이 일변하는 일이 있었다. 고려시대 유물 뭉치인 불교 공양구供養具가 무더기로 흥륜사 전면 도로 변에서 느닷없이 출현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래 이참에 제대로 신라시대 영묘사 제대로 한 번 들쑤셔 확인해 보자 해서 문화재청이 아마 긴급 조사비 같은 명목으로 돈을 내려보내고 경주시에서 조사단을 선정해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단으로는 (재)서라벌문화유산연구원이라는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이 선정됐다.

그 조사단장 차순철이 이래저래 경주 발굴경험이 많다. 

조사지점은 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 285-6번지 일대, 딱 보면 지금의 흥륜사 경역을 치고 들어가서 마당을 팠다. 
 

 
그 조사 현장이라 해서 조사단이 문화재청을 통해 오늘 배포한 한 장면이다.

여담이나 조사현장을 공개하면서 저렇게 지저분하게 공개하는 데는 처음 본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저 상태로 나는 암것도 알아 보지 못하겠다.

초석 몇 개, 그 밑을 바치는 적심 몇 개 보일 뿐이다. 

이번 조사 성과를 조사단은 이렇게 요약한다.

황룡사 금당과 견줄 만한 규모의 2중 기단에 차양칸을 갖춘 ‘대형 금당지’를 확인하였다.

딱 이 한 줄이다.

절터를 팠더니 탑과 더불어 그 양대 핵심인 금당金堂, 곧 부처님을 봉안한 안방을 확인했다.

그 안방이 규모라 열라 크다. 딱 이거다. 
 

기단

이것이 새삼스러운가? 

물론 의미가 없겠는가? 말로만 듣던 영묘사 금당이라 추정할 만한 건물터 흔적이 나왔는데 왜 의미가 없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나왔다 해서 의미가 있는 시대는 이제는 아니다.

찐빵에 앙코가 있어야 하듯이 금당 없는 사찰이 어찌 사찰일 수 있겠는가? 

사람을 해부했더니 심장이 나왔다는 말이랑 진배없다. 

덧붙여 금당 자리를 확인함으로써 그것을 중심으로 포진했을 절의 본래 분포 범위를 짐작케 하는 중심점을 확인했다.

금당 앞쪽에는 틀림없이 목탑 자리가 나올 것이다. 

이 금당은 조사 결과 신라시대에 등장해 조선시대에 걸쳐 운영된 것으로 조사단은 판단한다.

당연히 저런 분지는 기단을 만들어 건물을 올려야 하는데 기단은 상·하층 2중 기단과 내·외진을 갖춘 직사각형 대형 건물 구조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보통 금당은 정사각형에 가까운데 길쭉이 형이다. 왜 길쭉이일까?

왜긴 왜야? 그에 봉안하는 불상들 때문이지. 부처님과 협시보살 두 분이라면 정사각형으로 괜찮지만, 황룡사 금당처럼 부처님도 여러 분, 그를 시봉하는 보살도 여러 분이면 좌우로 나란히 배치할 수밖에 없잖겠는가?

보나마나 저것이 금당이라면 그런 식으로 가운데 부처님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무수한 시다 보살님들을 배치했을 것이다. 
 

 
이것이 실제 크기를 반영한 상대적 금당 크기라 하는데 적어도 크기로 보면 황룡사 금당에 버금한다.

왜 영묘사가 이런가?

영묘사는 실은 별궁이었다. 누구를 위한 별궁? 퇴역 왕실 여성을 위한 별궁이었다.

비구니 사찰이었다. 또 다른 왕궁이었다.

그러니 커질 수밖에 더 있겠는가?

한편

금당 아래층 기단에서는 햇볕을 가리기 위한 시설의 주춧돌인 차양초석을 설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2중 기단에 차양칸을 갖춘 금당은 경주에서는 황룡사 중금당(584년), 사천왕사 금당(679년)을 제외하고는 확인된 사례가 없을 만큼 경주에서 보기 드문 구조로 신라 사찰 금당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고 하는데, 이 부분은 재검토가 필요하다. 
 


나아가 금당 기준 영묘사는 어찌 변했는가?

고고학에서는 이 놀음으로 날밤을 까는데 이번 조사 결과는 이리 말한다.

금당 건물은 적어도 3단계 이상의 변화를 거친 것으로 확인되었다. 창건기인 삼국시대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금당지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연화문 수막새로 보아 그 존재가 짐작되며, 특히 금당 앞 폐와무지에서는 삼국 말~통일 초에 사용된 연화문 곱새기와가 출토되어 삼국시대에 이미 금당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8세기 전반에는 금당 북동쪽 모서리에 가구식 계단석을 설치한 대형 기단 건물로, 9~12세기 사이에는 넓은 차양칸을 갖춘 대형 건물로 변화된 것이 이번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나아가 
 
또한, 현재 금당지 내부에서 확인된 내진 성토층은 기단석에서 초석까지 높이가 230cm로, 황룡사 중금당의 기단 높이인 110cm에 비교해도 두 배 이상 높은 규모로, 국내에서 가장 높은 기단을 갖춘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성토층이 높은 이유는 지반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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