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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충북 진천의 김유신 사당 길상사

by taeshik.kim 2020.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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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김유신 사당 '길상사' 이전…문중 반발로 백지화
송고시간 2020-11-09 14:24 
박종국 기자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태실 인근으로 옮겨 관광활성화"
종친회 "충북도 기념물 1호 지위 상실…이전사업 반대"

 

 

 

진천 김유신 사당 '길상사' 이전…문중 반발로 백지화 | 연합뉴스

진천 김유신 사당 '길상사' 이전…문중 반발로 백지화, 박종국기자, 문화뉴스 (송고시간 2020-11-09 14:24)

www.yna.co.kr

 

충북 진천鎭川은 김유신이 탄생한 곳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 등지에 의하면, 진천은 고구려 수중에 있을 적에는 금물노군今勿奴郡 혹은 만노군萬弩郡이라 했다가 신라 경덕왕 시설에 흑양군黑壤郡 혹은 황양군黃壤郡이라 했고,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진주鎭州라 함으로써 진천이라는 지명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진천이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13년에 탄생했다. 다른 이름으로 순화淳化 연간에 등장한 상산常山이 있다. 조선 세종 당시 속향屬鄕으로 금천金泉이 있었으니, 천泉을 세속에서 진眞으로 읽기도 했다고 한다. 

 

진천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제1등 공신은 김유신 탄생지에서 말미암는다. 그런 까닭에 현재도 김유신과 관련한 역사가 서린 곳에 곳곳에 포진한다. 

 

길상사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청주목 진천현지리지 / 충청도 / 청주목 / 진천현에서는 이 일대에 포진하는 대표 명산으로 현 남쪽에 있는 소이산所伊山과 더불어 태령산胎靈山을 거론했으니, 그 내력이 이렇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만노군 태수萬弩郡太守 김서현金舒玄의 아내 만명萬明이 아이를 밴 지 20달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유신庾信이라 하고, 그 태胎를 현 남쪽 15리에 묻었는데, 화化하여 신神이 되었으므로, 태령산이라 했다. 신라 때부터 사당을 두고 〈나라에서〉 봄·가을에 향香을 내려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라 행했다. 본조(고려를 말함-인용자 태조太祖 무인戊寅에 이르러 비로소 국제國祭를 정지하고 소재관所在官(해당 지역 관리)한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속칭 태산胎山이라 한다.

 

新羅眞平王時, 萬弩郡太守金舒玄之妻萬明姙身, 二十月生子, 名曰庾信, 藏胎於縣南十五里, 化爲神, 因號胎靈山。 自新羅時置祀宇, 春秋降香行祭, 高麗因而不革, 至本朝太宗戊寅, 始停國祭, 令所在官行祭, 俗稱胎山。

 

 

태령산 김유신 태실 

 

이를 보면 신라시대 이래 태령산 인근 어디엔가 사당을 설치하고서는 김유신을 제사했음을 엿본다. 현재 그 역할을 하는 데가 길상사吉祥祠라는 곳이다. 한자어 표기가 없으면 자칫 불교 사찰 아닌가 착각하기 십상인데, 보다시피 사당 사[祠]를 쓰는 제사장이다. 

 

그 소재지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508번지라, 김유신 사당이라 해서 이 일대 경관이 아주 잘 단장된 곳이며, 특히 봄날 사쿠라 피는 계절이 압권이다. 하긴 그러고 보니 이 봄날 말고는 내가 현장을 가 본 적이 없이 다른 시절에는 어떤지는 내가 모르겠다. 

 

 

이 지도에서 보다시피 현재의 길상사는 진천군 읍내를 중심으로 동쪽 인접지점에 위치하나, 문제는 김유신 태실이 있는 태령산, 그리고 그의 탄생지로 전하는 그 아래랑은 상당한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 두 지점 사이에는 험한 산과 고개가 있다. 

 

저 중에서도 역사성이라는 측면에서 당연히 태령산과 그 아래 김유신탄생지로 전하는 일대가 상당한 비중을 점하는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도당산성 아래 지금의 길상사는 1926년에 들어섰다는데, 진천군에서 저런 격리성을 극복하고, 사당까지 한군데 몰아서 김유신으로 문화상품을 만들려 한 모양인데, 문제는 문중의 격렬한 반대와 덜커덩 문화재 지정 문제가 걸려 무산되고 말았다 한다. 

 

태령산

 

나는 이 대목을 몰랐는데,  저 길상사가 1975년 지정된 충북도기념물 1호란다. 기념물은 장소성을 중시하거니와, 그 핵심 장소를 포함해 주변 일정 구간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그런 까닭은 저런 기념물은 함부로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연히 옮기면 그 기념비성을 상실하는 까닭이다. 이 일을 어찌 김해김씨 문중에서 달가워하겠는가? 결국 벌떼처럼 문중에서 들고 일어나자 없던 일로 해 버렸다는데, 이전 계획이 상당히 서툴렀다는 느낌이 짙다. 

 

그건 그렇고 일세의 영걸 김유신을 연고로 하는 진천이 나는 언제나 왜 김유신으로 장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느냐 늘 불만이었거니와, 이참에 제대로 김유신 문화상품 개발했으면 한다. 

 

김유신 탄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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