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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巍:太仓元代古船的前世今生
2022-10-11 16:13:41
■朱巍
*** 중간중간 내가 이해 못한 대목이 있어 그런 데는 그대로 원문을 두었고 오역 또한 어찌 없겠는가?
태장太仓은 역사 유구한 항구도시라 춘추시대 오국吴國이 이곳에서 창仓을 설치한 까닭에 옛 이름이 “태창太仓”이다.
그만큼 강이 촘촘해 장강을 통해 바다에 이른 까닭에 자고로 장강이 바다로 통하는 문호로 인식됐다.
원나라 시절인 지원至元 19년(1282) 주청朱清과 장선张瑄이 태창 유가항太仓刘家港을 개시하고 조운 식량을 바다로 실어나르는 신노선으로 개발하고 그에 더해 대외 창구로 개발하니 태창은 상인들이 구름처럼 몰리고 밖으로는 일본 고려 유구 등과 통하니 “육국마두六国码头[Six Nations' Pier]라 일컬었다.
원나라 시대 태창 유가향은 장강구长江口 최대 좋은 항구라 “양곡 실은 배와 장사하는 배가 줄지어 서고 큰 돛대를 휘날리니 그 집결한 모습은 마치 수풀 같았다[粮艘商舶,高墙大桅,集如林木]”고 했다.
당시의 반경하半泾河는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흘러들었으니 이것이 유가향刘家港의 모습이었다.
2014년 반경하半泾河 북부에서 1척 원대 고선박이 발견되어 발굴을 진행한 결과 문헌기록을 확인시켜 주는 한편 이곳이 대외 무역 중요 항구임을 실증했다.
반경하半泾河는 전체 길이 20여 킬로미터라 남북으로 달리는 하도河道로 태창고성太仓古城 동문 밖에 위치한다.
2014년 5월, 반경하半泾河 만풍촌万丰村에서 준설 과정 중에 1척 목선이 발견됐다.
2014년 8~12월,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이 태창박물관太仓博物馆과 연합해 이 선박을 긴급 발굴조사하고 선체 전체는 몽땅 들어내서 만풍촌万丰村 해풍농장海丰农场으로 옮겨 문물 보호조치를 취했다.
고선古船은 잔장残长 17.83미터, 너비 5.76미터, 높이 1.56미터라, 강소江苏 경내 근년래 발견된 고선박 중 최대 규모였다.
목재에 대한 14C 연대 측정결과 그 건조연대는 대략 원대元代라 거금距今 660년 전 선박임이 드러났다.
가정태창주지嘉靖太仓州志》에 이르기를 “반경하는 성 동쪽 수 리를 띠처럼 돌아 남쪽 누강으로 흘러들며....옛날 수면은 홍광하고 돛대를 단 배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니 바닷물이 빠르게 출렁였다[半泾横带城东数里,南入娄江……昔水面弘广,帆樯云集,海潮迅涌]”고 한다.
반경하 남단은 고루古娄와 강이 교차하며 원나라 시대에는 유가항刘家港 중요 브랜치가 있던 곳이라 이곳을 해선들이 모름지기 거쳐야 하는 곳이라 특히 번성한 곳이었다.
원대 태창 시인 마린马麟이 《반경조생半泾潮生》이라는 시에 이르기를 “어선과 상선이 기쁘게 나루를 지나면서 북을 울리고 소를 잡아 해신을 제사한다[鱼船商舶喜通津,挝鼓椎牛祀海神]”라 하며 당시 대량으로 海船이 반경하半泾河에 정박했음을 읊었으니 바다로 나아가기 전에 격고击鼓 살우杀牛하며 해신海神 제사를 거행한 의식의 생생한 장면들이다.
일찍이 1993년, 반경하 남단에서 원대 침몰선 잔해를 발견한 일도 있다.
2014년 고선박이 출현함으로써 원대 반경하와 유가항 존재를 유감없이 증언한다.
이 태창 고선 주체는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아 중국 고선古船의 용재用材, 결구结构, 공예 연구 방면에 실증 자료를 제시하며 아울러 절강 일대 조선사 연구에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고선은 수복전 규모가 길이 17.83m, 너비 5.76m, 높이 1.56m지만 수복후는 길이 19.8m, 너비 5.55m, 높이 1.71m다.
古船은 화물선[货船]이고 가능 적재 중량 30吨이며 비수량은 45吨이고 항속航速 12节이다.
평면은 대략 柳叶形[willow leaf shape]이며 앞은 횡단면 “V”자형이고 후단 횡단면은 “U”자 형이며, 도합 11개 격창隔舱에 쌍돛대[双桅]다.
선형船型은 평두平头·평저平底하는 사선沙船과는 다르고 첨저尖底하는 복선福船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 조선재료造船材料로 보건대 광선广船에 속하지도 않으며 선체船体 선형线型 특징으로 보건대 절강선江浙船에 속하며 구체로 보면 장강长江 지역 도어선鱽鱼船[fish boat]과 허다한 유사점이 있다.
선체 외판外板과 용골龙骨은 송목松木이며 호현목护舷木은 삼목杉木, 창벽판舱壁板 저부底部는 장목樟木, 창벽판舱壁板 상부는 삼목杉木, 위좌桅座는 장목樟木이다.
선체는 전체로 보아 쇠못[铁钉]으로 박아 부재를 연결했으니 쓴 못으로는 구정钩钉·방정方钉·蘑菇钉[mushroom nails] 등이 있고 중국 전통적인 유회념봉油灰捻缝을 채용했다.
고선은 두 갈래 호현목护舷木을 설치하고 목판木板 여러 군데에서는 해충이 갉아 먹어 생긴 도동盗洞이 있다.
출토 위치랑 선형船型을 고려할 때 이 선박은 내륙 운하와 장강을 오가고 근대 항해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출토 당시 고선박은 삼분지 2 정도가 잘 보존되어 중국 고대 선진적인 조선기술을 보여주었으니 구체로 그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일한 “용골조龙骨吊”다. 이 선박에는 7곳 창벽판舱壁板이 용골龙骨과 연접한 데가 있으니 방형 목제로 만든 “용골조龙骨吊”를 설치함으로써 배를 움직이는 용골龍骨과 창벽舱壁을 붙임으로써 견고함을 더했다.
“용골조龙骨吊”는 태창太仓 원대元代 고선 출토 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이다.
“용골조龙骨吊”에 해당하는 말은 명대明代 곽여림郭汝霖 《중각사유구로重刻使琉球录》에 “도국兜鞠”이라는 말로 보이는데, “도兜”가 곧 “용골龙骨”이며 “국鞠”이 곧 “국锔”이다.
태원 원대 고선은 목전 국내 유일한 고고考古 발견 “용골조龙骨吊” 갖춤 기술을 구사한 실례로 중국 고대 주선舟船 건조기술 연구에 중요한 신물자료를 제공한다.
둘째, 미관실용의 선체 선형船体线型이다. 고선古船 선수船艏는 尖首와 비슷하고 “V”형에 근접한다. 선체 중中·후부後部는 “U”자 형이고 선미는 조금 좁혀져 더 큰 횡장비를 보인다.
전반적인 배 스타일은 광순光顺·유창流畅·우미优美하다. 이런 선형은 남양南洋 북양北洋 연해 항해에 적합하다.
첨수尖首에 가까우면 파도가 만드는 저항을 감소케 하는데 유리하다. 선체 중中·후부後部는 “U” 자형을 띠는데 선실 용적을 높여 많은 화물을 선적하게 하며 동시에 선체 항해 중의 온정성稳定性을 보증保证한다.
선미 형태가 점점 좁혀지면 공기 흐름이 완전히 제어되고, 이는 조타 효율성을 높이고 저항을 줄여준다.
물 저항의 감소와 큰 횡장비는 의심의 여지 없이 속도를 높여준다.
배가 크지 않고 물이 깊지 않은 까닭에 내하内河 운항에 적합하다.
셋째, 방수항침防水抗沉의 수밀격창水密隔舱이다. 이 배에는 도합 10도道 격창판隔舱板이 있어 총계 11개 수밀격창水密隔舱을 설치했다.
수밀경창은 격창판隔舱板을 통해 선창船舱을 하나하나 구역화하며, 각 창실로 하여금 서로 상통하지 않는 “방수벽防水壁”을 형성토록 했다.
이런 기술의 발명과 사용은 진대晋代에 시작해 당대唐代 이후 광범위하게 응용된다.
선박에 창벽舱壁을 설치하면 선박의 결구 강도와 항침성抗沉性을 높이는데 유리하고 아울러 화손货损을 감소케 한다.
넷째, 강하고 내구성 있는 철정铁钉 연접连接이다. 중국은 진한秦漢 시대에 이미 보편적으로 철정으로 연접하는 선판船板을 제작했다.
철정铁钉을 이용해 선판을 이음으로써 배 만드는 일은 더욱 편리해지며 빨라졌으며, 선박船舶은 더욱 견고해져 사용연한과 유수주기维修周期가 길어진다.
다섯째, 중국 특유한 유회염봉油灰捻缝이다. 염료艌料는 속칭 “유회油灰”라 한다. 동유桐油와 마사麻丝(혹은 죽사竹丝), 석회石灰(혹은 蛎灰)로 비율을 조합해 만든다.
동유桐油는 중국 특산이다. 板缝先打入粘有桐油的 마사麻丝(광동广东·광서广西에서는 죽사竹丝를 쓴다), 다시 염료艌料로 틈을 틀어막고, 마지막으로 전체 배에 동유桐油를 발라 보호한다.
태창 원대 서선에 쓴 염료艌料는 곧 동유桐油와 마사麻丝와 회구灰构로 합성했다.
여섯째, 안전합리적 위좌桅座 설치다. 중국 해선海船과 일부 내륙선은 돛대桅杆 하부에 돛대 받침桅座과 돛대 clamp[桅夹]을 설치한다.
선박의 위간桅杆과 범帆은 중량이 무거운데다 加起来很重,船帆受到风力,经过桅杆传递给桅夹、含檀、桅座하여 可以较均匀地将外力分布于船体하고 推动船的航行하여 应力 集中 감소에 유리하며 배의 강도와 안전성에 유익하다.
이 고선박엔 두 개 桅座[mast seats]가 있어 고대 선박에는 최소 두 개 이상 돛을 장착했음을 보여준다.
이 고선박 주용골主龙骨과 짧은 수룡골탑首龙骨搭 접점에 원형 구멍을 뚫었으니 이를 속칭 “보수공保寿孔”이라 하는데 그 안에 홍색 베로 감싼 2개 북송시대 동전 “대관통보大观通宝”를 넣었다.
이는 선박 건조 때 방입한 것으로, 이는 안전항해를 기원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중국 고대 조선에서 통행한 습속이다.
예컨대 복선福船은 대체로 “보수공保寿孔”에다가 7매 동전과 1면面 동경铜镜을 넣으니 이를 “칠성반월七星伴月”이라 했다.
절선浙船은 습속에 5종 그금속과 5종 양식을 넣으니 이를 “오금오속五金五谷”이라 했다.
이 고선박은 원대元代 해선海船 실례实例로 그 구체 운영 정황은 고대 문헌에 남은 흔적을 근거로 그 실마리 일단을 푼다.
원나라에 중국에 온 모로코摩洛哥 여행가 이븐 바투타伊本·白图泰는 그의 《유기游记》에 이르기를 중국 해선은 “세 종류로 나뉘는데 큰 것을 ‘동극艟克’, 그 복수를 ‘주노극朱努克’이라 하며, 중간 것을 ‘조艚’, 작은 것을 ‘아아모舸舸姆’라 한다.
대선大船에는 10개 돛이 있지만 적어도 3개 돛은 있으며, 돛은 등멸藤蔑로 편직编织해서 연결하며 그 형상은 의자와 같으며……배 위에는 갑판 4층이 있고 그 안에는 방창 房舱과 관창官舱과 상인창商人舱이 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태창 고선은 “동극艟克” 규모는 아니라서 혹 “조艚”이거나 “아아모舸舸姆” 중 하나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원대 해선海船 인원 배치에 관해 중앙민족대학中央民族大学 역사문화학원历史文化学院 상연빈尚衍斌 교수 연구에 근거하면 원대元代 해선海船은 보통 총설관船总管(“강수纲首”라고 하니 곧 선장을 말하며 보통 거상巨商으로 충임한다)·부령部领(곧 수수장水手长)·주수舟师(화장火长이라고도 하니 곧 영항원领航员으로 지남침指南针을 관장한다)·타공舵工(간혹 대공大工·장년长年이라고도 하며 舵를 관장한다)·정수碇手(碇·锚 담당)·업반亚班(곧 樯·桅 담당 수수水手)·초공梢工(보통 수수水手)·직고直库(무기 담당)·잡사杂事(일상 잡무 담당)가 있었다.
원나라 사람 정원우郑元祐는 《교오집侨吴集》에서 말하기를 원나라에서는 해운海运에 필요한 조선漕船에서 고모제雇募制를 실시해 “선호의 대소라든가 적재 곡물의 다과에 관계없이 관에서 석石으로 돈을 (따져?) 지급하고는 그들을 모집 고용하니 그들을 일러 수각전이라 했다[论船户大小、载粮多寡,官以石给钞, 雇募之,谓之 ‘水脚钱’]”고 한다.
“石”은 계량 단위이며 원나라 시대 “1석石”은 대략 지금의 75.4千克에 해당한다.
“수각전水脚钱”은 有利可图,船户 “趁时买物,修造海船……为有余利,争趋造船,专心运料”하다. 고모제雇募制는 해운海运이 효율적으로 지속되게 한 힘이다.
《원사元史》에 기재한 원조元朝의 해외무역 소용 상선商船은 “관본선官本船” 제도를 실행했으니 이는 원 왕조가 해외 무역을 독점하기 위함이다.
정부는 해선 건조 비용을 펀딩하고 아울러 자금을 풀고 해외로 나가 장사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정부는 그 이득의 70%를 취하고 나머지 30%는 민간이 가져갔다. 사취 또한 엄격히 금지하는 법령이 있었다.
침몰 원인
이 고선박 선수船艏·중부中部·미부艉部 세 곳에는 인위적인 파동破洞이 있고 그 구멍에서는 날카로운 도구로 판 흔적이 있으며 안은 크고 밖은 작아 이 선박이 인위로 파괴되어 침몰했음을 보여준다.
인위로 파괴되어 스스로 침몰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명나라 때 《홍치태창주지弘治太仓州志》에 이르기를 원말元末 기의군起义军 영수 장사성张士诚이 소주苏州를 점령한 이후에 해적 침탈을 막고자 将太仓至和塘尾堵塞以屏蔽海潮하여 导致半泾等河港堵塞,“市民无贩海之资矣”라 했다.
반경하에 정박해 있던 이 선박은 강이 막혀 더는 운항하지 못하고 버려졌을 수도 있다.
古船은 2014年 발견 이래 만풍촌万丰村 해풍농장海丰农场에서 근 5년에 달하는 전반기 문물 보호공작을 실시했다.
이 기초 위에 역사문헌 기재와 고고실물 대비에 근거하여 많은 전문가의 반복 논증을 거치고 전통 조선 류정流程을 엄격히 준수하여 이 선박은 2019년 6월 태창박물관太仓博物馆 지하 중정中庭으로 옮겨져 수복을 진행하고 아울러 2021년 9월에 완성을 보아 대중에 전시되기 시작했다.
수복 후의 고선古船 각종 부건部件은 관람객들이 특별히 고대 선박을 위해 꾸민 전시실에서 원나라 해선 풍채를 볼 수 있으며, 근거리에서 고대 태창이 대외 무역기지로 번성한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이 글은 《대중고고大众考古》 2022年 05月刊에 실렸으며 작자는 태창박물관장太仓博物馆馆长이며 부연구관원副研究馆员이라 작자 동의를 얻어 전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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