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EWS & THESIS

파주 오두산성 2차 학술발굴조사(상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6. 5.
반응형

아래 소식에 대한 상보다. 

깨뜨린 그릇·성벽 배수구 확인한 파주 오두산성 2차 조사

 

 

깨뜨린 그릇·성벽 배수구 확인한 파주 오두산성 2차 조사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는 경기 파주시 오두산성에 대한 두 번째 발굴조사에서 처음 쌓은 성벽과 고친 성벽이 교차하는 양상을 비롯해 성벽과 관련된 배수구 흔적을 확인했다고

historylibrary.net

 

***

 

개요 
○ 조 사 명 : 파주 오두산성 2차 학술발굴조사
○ 조사지역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662번지 일원
○ 조사유형 : 발굴(문화재청 허가 제2022-0968호)
○ 조사면적 : 140㎡
○ 조사기간 : 2023년 04월 10일 ~ 5월 12일(실조사일수 19.6일)
○ 시 행 자 : 파주시청
○ 조사기관 : (재)가디언문화유산연구원

현황 
조사지역은 사적 파주 오두산성의 동쪽 지역,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662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오두산은 파주 경내를 흐르는 임진강(북측)과 한강(서측)이 합류하는 지점에 입지하고 있으며, 합류된 강은 김포와 강화를 지나 서해로 흐른다.

이 지역은 예부터 강을 따라 내륙으로 진입할 수 있는 교통로였으며, 근방에서 수상 진입로를 방어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파주시에서는 현재 이 오두산성을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정비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왼편 물로 표시된 지점이 한강(아래)과 임진강(위)가 만나는 데다.

 
문헌조사
오두산성에 대해서는 고려 ~ 조선시대의 지리서에 위치와 규모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고지도에 표기된 오두산성에 대한 명칭도 烏島山(오도산) → 烏頭(豆)山(오두산) → 鰲頭山(오두산) 순으로 명칭이 변화되었다. 

오두산의 명칭 변화로 파주 오두산성의 명칭도 오도성(烏島城), 오도성산성(烏島城山城), 오도산성(烏島山城), 오두산성(鰲頭山城) 등의 순서로 함께 변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까마귀 형상을 띈 섬 형태의 산이란 의미를 가지다가, 점차 까마귀 혹은 비둘기 등 새의 머리 모양을 가진 산으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에는 자라 머리의 모습을 닮은 산으로 불려 현재까지도 불리고 있다.

이러한 지명은 오두산이 지형적으로 삼면이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고 강안江岸에서 돌출되어 나온 지세를 빗대어서 이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옛지도에 보이는 오두산성

 
고려사 권56 지리지 교하군 조
交河郡有烏島城漢江臨津下流會于此
교하군(交河郡) 오도성(烏島城)이 있다. 한강과 임진강 하류가 이곳에서 합류된다

세종실록지리지 경기 교하현 조
烏島城在縣西, 漢江臨津下流會于此
오도성(烏島城)은 현 서쪽에 위치한다.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의 하류(下流)가 이곳에서 합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 경기 교하현 산천 고적 조
(山川)烏島城山在縣西七里
오도성산(烏島城山) 현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古跡)烏島城山城[石築周二千七十\一尺 漢江臨津下流會于此
오도성 산성(烏島城山城) 석축이고 둘레는 2,071척(약 635m, 영조척 1尺=약30.65㎝)이다.
한강과 임진강 하류가 여기에서 합류된다.

동국여지지 2 경기도 교하 고적 조
烏島城山城 石築二千七十\一尺 相傳三國時所築 漢江臨津會于其下
오도성 산성 석축이고 2,071척이다. 삼국시대때 쌓았고 한강과 임진강이 여기에서 합류한다.

여지도서 경기도 교하 산천조 고적 조
(山川) 鰲頭山一名鳩鳥山 臨津漢水之流來會于山前
오도산(鰲頭山)은 일명 구조산(鳩鳥山)이라고도 한다. 임진과 한강의 물이 흘러서 산 앞에서 만난다.
(古跡) 鰲頭山城 在鰲頭山上 石築 周回千餘步
오두산성(鰲頭山城)은 오두산 위에 있으며 돌로 쌓았고 둘레가 천여보이다.

증보문헌비고 제21권 여지고 산천 경기 교하 조
交河 烏頭山一名鳩鳥 輿地勝覽作烏島城 邑誌作鰲頭 在西七里
교하交河 오두산烏頭山 일명 구조산鳩鳥山이라 하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오도성烏島城이라 하였고, 읍지邑誌에는 오두산鰲頭山이라 하였다. 서쪽 7리에 있다.

증보문헌비고 제26권 여지고 관방 성곽 경기 교하 조
交河鰲頭山城輿鑒作烏島城山城, 三國時所設石築[周千餘步今廢
교하(交河) 오두산성(鰲頭山城) 《여지승람(輿地勝鑒)에는 오도성산성(鳥道城山城)이라 하였다. 삼국시대 때 설치한 것으로서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여보인데, 지금은 폐기되었다.

대동지지 경기 교하 편
烏頭城, 臨津漢水會合處本百濟關彌\城周二千七十\二尺四面峭絶唯東連山麓三面環以海水距郡西
北十\四里長命山古壘有遺址
오두성(烏頭城) 임진강과 한강이 합하여 모이는 곳으로 본래 백제 관미성으로 둘레가 2,072척이다. 4면이 절벽이고 삼면이 바닷물로써 둘러싸여 있다. 군에서 서북쪽으로 14리 떨어져 있다.
 
참고자료 : 오두산성과 관미성
파주 오두산성을 백제 관미성關彌城으로 처음 비정하여 기록된 사료는 대동지지大東地志(1864)다. 관미성이란 명칭은 삼국사기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특히 4세기 후반 대에 집중되어 나타나며, 백제와 고구려 격전지로 묘사되어 있다. 

이번 조사지점

 
○ 삼국사기권 25, 백제본기 3, 진사왕 8년(392년)
秋七月, 高句麗王談德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漢水北
諸部落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7월에 고구려왕 談德[담덕:廣開土王(광개토왕)]이 병사 4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北邊(북변)을 쳐 石峴[석현:지금의 開豐郡(개풍군) 靑石洞(청석동)]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진사)왕은 談德(담덕)이 用兵(용병)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漢水(한수) 이북의 여러 부락이 많이 함락되었다.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6, 광개토대왕 원년(392년)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乃拔

10월에 (왕이)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으로 峭絶(초절)하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하였다. 
 
○ 삼국사기권 25, 백제본기 3, 아신왕 2년(393년)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
心而雪恥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嬰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8월에 (아신)왕이 武(무)에게 이르기를, “관미성은 우리 북변의 要害地(요해지)인데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寡人(과인)의 痛惜(통석)하는 바다. 卿(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雪辱(설욕)하라"고 하였다.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南境(남경)을 칠 것을 계획하고, 武(무)가 몸소 士卒(사졸)에 앞장서서 矢石(시석)을 무릅쓰고, 石峴(석현) 등 다섯 성을 회복하려 하여, 먼저 관미성을 둘러쌌으나 고구려 사람이 성을 굳게 지켰다. 武(무)는 糧道(양도)가 이어지지 못하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6년 조 기사
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首攻取寧八城臼模盧城模盧城幹弖利□□□城關彌城牟盧□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利城彌城奧利城勾牟城古須能羅城頁□□□□城分而能羅□城□□城□□□豆奴城沸□□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께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대군이 백제의 국경 이남에 도착하여 寧人城…각미성(閣彌城)(지명생략)…등을 공취하여 백제의 국도를 핍박하였다. 

植案...삼국사기에서는 분명 관미성이 사면이 천애절벽으로 둘러친 바다 섬이라 했다. 이는 현재의 오두산성과는 여러 모로 차이를 빚는데, 그런 점에서 진짜로 오두산성이 관미성인가는 재검토해야 한다고 본다. 

 
조사지역 개황 
조사지역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662번지 일원으로 2차 학술발굴조사 면적은 140㎡이다.

파주 오두산성은 오두산 정상부(해발고도 109.1m)에 위치한다.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기준으로 정상부를 포함한 동남측 방향으로 뻗은 3개의 가지능선을 따라 내부에 2개의 계곡을 포함하는 포곡식산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해발고도 80 ~ 90m 사이에 위치하는데, 1992년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건립되면서 산봉우리를 절토하였고, 능선상의 경사면에 위치한 성곽을 덮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기존 조사에서는 오두산성을 오두산 정상부의 내성과 계곡부의 외성이 축조된 것으로 보았으며, 외성의 둘레는 약  1281.2m, 내성의 둘레는 약 610.1m 정도로 추정하였다.
 

조사지점. 뒤쪽 물이 한강(왼편)과 임진강(오른편)이 만난다.

 
문헌자료와 비교해 보면, 1760년 여지도서에 성의 둘레를 천여보로 기록하였는데, 1보를 약 1.26m로 환산했을 경우 약 1,260m로 추정되어 현재의 외성과 가장 유사하게 산출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면적으로 산출해 보면, 오두산성의 내부면적은 약 74,430㎡(내성 내부면적 약 27,100㎡, 외성 내부면적 약 47,330㎡)정도이다.

다만, 우리 연구원에서 최근 3년간 실시한 조사를 바탕으로 보면, 오두산성의 성벽구조는 내외성 구조가 아니라 초축과 수축 과정에서 교차하는 성벽이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오두산은 현재 군사지역으로 한강 수변 지역에 경계철책이 설치되어 있으며, 오두산성 서쪽과 북쪽으로 군시설이 위치한다.

성벽의 진행방향과 중복하여 참호 및 교통로 등 군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일부 참호는 성벽의 면석을 활용하여 조성하였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성벽은 통일전망대, 진입도로, 군시설 등으로 인하여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조사내용 
발굴조사는 시굴조사 시 배수구, 성벽교차부 등 성벽 관련 유구가 잘 남아 있는 7~9번 트렌치의 면적 140㎡에 대해 진행하였으며, 석축성벽의 구조 및 축조과정, 성벽과 연결된 내부시설의 파악을 목적으로 하였다.

조사지역은 오두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가지능선 중 제일 북동쪽에 자리한 능선의 북쪽 사면에 해당하며, 조사지역 내 해발고도는 80~85m 정도이다.

조사는 남북으로 8×9m 그리드 2개를 구획하여 진행하였다. 그리드 내부 조사는 먼저 등고선과 성벽의 방향을 고려하면서 피트를 설치하여 층위 상황을 살핀 후 상부부터 단계적으로 제토하며 하강하였다.

체성부 상단은 전면 노출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성벽은 면석의 보존상태가 불량할 경우 안전을 고려하여 일부만 노출하고, 기저부의 축조 상황 파악에 중점을 두었다. 조사가완료된 지역은 사진 촬영 및 실측 등의 기록작업을 병행하였다.
 
1. 층 위
조사지역의 토양특징은 산악지에 판상의 잔적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도면 1, 2 참고), 층위 상황은 Ⅰ층: 흑갈색 사질점토(표토층) → Ⅱ층: 암갈색 사질점토(퇴적층1) → Ⅲ층 : 갈색 사질점토(퇴적층2) → Ⅳ층 : 명갈색 사질점토(대지조성) → Ⅴ층 : 적갈색 사질점토(정지) → Ⅵ층 : 황적갈색 풍화암반토 및 암반(기반) 순으로 확인되었다. 
 

째 보니 요로코롬 생겨먹었다고

 
 2. 북쪽 그리드
북쪽 그리드는 군 헬기장 부지 동남쪽에 인접하여 위치한다. 헬기장 조성 시 복토한 것으로 보이는 매립토가 30~50㎝ 깊이로 쌓여 있었으며, 이를 걷어내자 잔존한 성벽의 체성부가 노출되었다.

조사지역 최북단에 위치한 배수구는 조사과정에서 성 내부 쪽이 대부분 훼손된 상태임을 확인하였으며, 내벽 부분에서 집수를 위한 구조물의 일부가 잔존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성벽의 상부는 내외 협축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외면이 대부분 토압으로 인하여 붕괴되었으며, 하단 일부만 잔존해 있는 상태였다.

이는 체성 상부에서 토석혼축 양상이 나타나고 있어, 구조적으로 장시간에 걸친 침수에 취약하여 발생한 현상으로 파악된다.

성벽 조사 시에는 잔존 상태와 안전을 고려하여 체성부의 전면제토를 지양하였다. 탐색 피트는 그리드의 중간 부분에 등고선과 수직방향으로 구획하였다.

조사는 잔존상태가 양호한 체성 상부 및 하단부 위주로 진행하였는데, 면석 및 기저부의 양상은 남쪽 그리드와 대동소이했다.
 

1차 조사

 
노출된 성벽의 내·외부에서는 초축성벽 상부로 수축하고 보축한 흔적이 잔존한 성벽의 체성부가 남쪽 그리드에서 북쪽 그리드까지 사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성벽의 수축은 기존 성벽을 최대한 이용하여 구축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수축 후의 성 내벽 진행방향이 북쪽 그리드 남쪽 부분에서 ‘ㄴ’자로 크게 꺾이며 남쪽 그리드 방향으로 이어졌다.

그리드 내 성벽 내부에서는 복토층을 걷어내자 바로 평평한 풍화암반층이 확인되었다. 

풍화암반층이 평평하게 나타나는 것은 성을 축조할 당시 암반을 굴착하여 성벽에 사용할 성돌을 조달하면서, 성 내부 바닥의 정지작업도 병행하여 사용면을 조성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북쪽 그리드 내, 잔존한 수축 성벽의 내벽과 인접하여 2~2.5m 내외의 등 간격으로 고정주(固定柱) 주공 3기가 확인되었다.

고정주는 수축 성벽을 구축하기 위해 보조적으로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3. 남쪽 그리드
남쪽 그리드는 북쪽 그리드의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의 평탄지 및 북쪽 사면 일부를 포함한다.

체성부 및 성벽 외면의 조사방법은 북쪽 그리드와 동일하게 그리드 중간부에 등고선과 수직방향으로 피트를 구획하여 진행하였다. 
 
피트 하단은 성벽 기저부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하여 암반층까지 굴착하였다.

이를 통해 외벽의 아래쪽은 자연암반을 비스듬하게 ‘L’자형으로 굴착하고 정지하여 성벽을 조성하였으며, 2m 내외의 상부부터는 내외 협축으로 성벽을 구축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벽 기저부는 기반암을 일부 정지하여 조성하였는데, 기반암 위와 1단 면석 외면으로 적갈색의 사질점토를 붙여 견고하게 다졌다.

그리드의 남쪽 부분에는 대호(잔존 동최대경80㎝ 내외)가 매립되어 있었는데, 자연 암반을 정지하고 사용면을 조성하면서 대호 주위에 판석 몇 개를 둥글게 돌려 저장시설(혹은 제의시설일 가능성도 있음)의 범위를 구획하였다. 
 

 
대호는 내외면을 격자 타날하였으며, 경부에는 3~4조의 횡침선을, 견부에는 3조의 돌대를 돌렸다. 

남쪽 그리드 북측의 성 내부 생활면에서는 부정형하게 조각난 다량의 와편이 바닥에 깔린 상태로 나타났는데, 이는 생활면 조성 시 바닥면(자연암반)의 상태에 따라 요철부를 정지하기 위해서 폐기된 와편을 재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시굴조사 시 확인된 성벽 교차부는 주변부를 좀 더 노출해서 진행방향 및 구조를 살펴보았다. 조사결과 남쪽 그리드에서 확인된 성벽 교차부는 성의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 원래 남쪽 방향으로 진행하는 초축 성벽 위에 남동쪽 방향으로 수축 성벽을 쌓으면서 조성된 것으로 드러났다.

초축과 수축 성벽 간 축조 상황을 비교해 보았을 때, 수축 성벽 축조시 일부 초축 성벽의 성돌을 재사용(진행방향이 다른 부분의 성돌)하여 구축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성 외벽이 완만한 호선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내벽의 진행방향은 부정형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성벽의 외벽(면)은 초축 성벽과 수축 성벽의 방향이 어긋나는 부분부터 덧붙여 쌓으면서 완만하게 맞추었지만, 내벽(면)은 성벽 상단의 일부 요철만 교정하면서 불규칙하게 잔존한 상태 위에 초축 성벽의 면석 등을 활용하여 새로 사용면을 조성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잔존한 수축 성벽의 내벽과 인접하여 북쪽 그리드에서 연결되는 고정주 주공 1기 및 초석 1기가 확인되었다.

초축과 수축 성벽은 체성부의 채움에 있어서도 일부 차이점이 드러났다. 수축 성벽의 체성부는 길이 30㎝ 이상의 비교적 대형의 잡석과 소형 잡석, 그리고 폐기된 와편을 사용하여 조성하였으나, 초축 성벽 체성부에서는 대형의 석재보다는 흙과 다량의 파손된 와편이 확인되었다.

남쪽 그리드 남측에서 확인된 성 내벽의 보축부분은 현문식의 문지가 위치할 가능성이 개진되어, 자문회의 완료 후 보완조사를 진행하였다.

보축부의 양 모서리를 중심으로 체성부까지 연장하여 탐색 피트를 설치하였다. 조사결과, 체성부의 보존상태가 좋지 못해 문지 관련 구조물이 이미 훼손되었을 가능성을 피할 수는 없지만, 탐색 피트 내에서 기단석 혹은 계단시설 등 문지와 관련된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4. 출토유물
 

왼쪽부터 주름무늬병, 편구병, 대부완


금번 발굴조사에서는 퇴적토 및 뒷채움토에서 다량의 기와편이 확인되었다. 기와는 대부분이 암키와로 격자타날(정격자, 사격자), 선문(직선, 사선), 어골문 등 작년 시굴조사와 동일한 문양이 나타났다. 
 
토기는 남쪽 그리드 수축 성벽의 내벽을 중심으로 인접한 위치에서 주름무늬병, 편구병, 대부완, 대호가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유물들은 대체로 통일신라시기(8~9세기)의 유적에서 공반 출토되는 기물들이다.
 

남쪽 그리드 출토 대호大壺

 
주름무늬병은 구연부와 저부가 훼손된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덧띠가 있는 병이다. 편구병은 동체 중위에 직선적으로 각이 형성된 주판알식 능형병이다.

대호는 내외면을 격자 타날하였고, 구연부에는 3~4조의 횡침선문이, 견부 외면에는 3조의 돌대를 돌렸다. 

대부완은 굽 부분이 결실된 상태로 출토되었으며, 구연부가 완만하게 외반하는 형태이다. 
 
조사성과
조사지역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662번지 일원으로, 금번 2차 학술발굴조사 면적은 140㎡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파주 오두산성은 오두산 정상부(해발고도 109.1m)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기준으로 정상부를 포함한 동남측 방향으로 뻗은 3개의 가지능선을 따라 내부에 2개의 계곡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 산성 내부에는 통일전망대를 비롯하여 도로시설, 군 헬기장, 참호, 작전로 등이 위치한다. 일부 군 참호 및 작전로는 성벽의 진행방향 상에 중복되어 있다. 

조사지역은 전체적으로 보면 오두산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있으며, 오두산성을 기준으로 보면 동남쪽 부분에 해당한다.

이곳은 2차 학술시굴조사에서 배수로 및 성벽 교차부가 확인된 지역이다.

발굴조사는 남북으로 2개의 그리드를 구획하여 진행하였다. 조사의 중점은 성벽 및 성벽 교차부의 노출 및 구조파악, 체성부·배수구 등 성벽시설의 구조 및 성격 파악을 위주로 하였다.

발굴조사의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조사지역의 층위 상황은 Ⅰ층: 흑갈색 사질점토(표토층) → Ⅱ층: 암갈색 사질점토(퇴적층1)→ Ⅲ층 : 갈색 사질점토(퇴적층2) → Ⅳ층 : 명갈색 사질점토(대지조성) → Ⅴ층 : 적갈색 사질점토(정지) → Ⅵ층 : 황적갈색 풍화암반토 및 암반(기반) 순으로 확인되었다.

2. 북쪽 그리드에서는 성벽의 체성부 및 배수구를 조사하였다. 배수구는 입수구와 체성부 내부의 벽석과 바닥석 일부만 잔존한 상태였다. 입수구로 연결되는 집수부는 헬기장 등 군시설 조성 과정에서 상당부분이 훼손된 상태로 보인다.

성벽의 상부는 내외 협축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대부분 붕괴된 상태로 일부만 잔존해 있었다.

노출된 성벽의 내·외부에서는 성벽을 수축 및 보축한 흔적이 북쪽 그리드에서 남쪽 그리드까지 사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수축 성벽은 내·외벽이 평행하게 연결되지 않고 있는 등 기존 성벽을 최대한 이용하여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수축 성벽 의 성 내벽 진행방향이 북쪽 그리드 남쪽 부분에서 ‘ㄴ’자로 크게 꺾이며 남쪽 그리드 방향으로 이어졌다.

3. 남쪽 그리드에서는 초축과 수축 성벽의 교차부를 확인하였다. 성벽은 외벽 기저부의 경우 자연암반을 비스듬하게 굴착하고 정지하여 조성하였다. 기저부에서 2m 내외의 상부부터 내외 협축으로 성벽을 구축하였다. 
 
시굴조사 시 확인된 성벽 교차부는 성의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 원래 남쪽 방향으로 진행하는 초축 성벽 위에 남동쪽 방향으로 수축 성벽을 쌓으면서 조성된 것으로 드러났다. 

초축과 수축 성벽 간 축조 상황을 비교해 보았을 때, 수축 성벽 축조시 일부 초축 성벽의 성돌을 재사용(진행방향이 다른 부분의 성돌)하여 구축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4. 성벽의 외면이 완만한 호선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내벽면의 진행방향은 부정형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성벽의 외벽(면)은 초축 성벽과 수축 성벽의 방향이 어긋나는 부분부터 덧붙여 쌓으면서 완만하게 맞추었지만, 내벽(면)은 성벽 상단의 일부 요철만 교정하면서 불규칙하게 잔존한 상태 위에 초축 성벽의 면석 등을 활용하여 새로 사용면을 조성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남쪽 그리드 북측의 성 내부 생활면에서는 부정형하게 조각난 다량의 와편이 바닥에 깔린 상태로 나타났는데, 이는 생활면 조성시 바닥면(자연암반)의 상태에 따라 요철부를 정지하기 위해서 와편을 재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5. 북쪽 그리드에서 남쪽 그리드에 걸쳐, 잔존한 수축 성벽의 내벽과 인접하여 2~2.5m 내외의 등간격으로 고정주(固定柱)로 추정되는 주공렬(4기) 및 초석 1기가 확인되었다.

수축 성벽을 구축하기 위해 보조적으로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축과 수축 성벽은 체성부의 채움에 있어서도 일부 차이점이 드러났다. 
 
수축 성벽의 체성부는 길이 30㎝ 이상의 비교적 대형의 잡석과 소형 잡석, 그리고 폐기된 와편을 사용하여 조성하였나, 초축 성벽 체성부에서는 대형의 석재보다는 흙과 다량의 조각난 와편이 확인되었다.

6. 남쪽 그리드 남측에서 확인된 성 내벽의 보축부분은 자문회의 당시 현문식의 문지가 위치할 가능성이 있어, 자문회의 완료 후 보완조사를 진행하였다.

보축부의 양 모서리를 중심으로 체성부까지 연장하여 탐색 피트를 설치하였다. 조사결과, 체성부의 보존상태가 좋지 못해 문지 관련 구조물이 이미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탐색 피트 내에서 기단석 혹은 계단시설 등 문지와 관련된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7. 유물은 퇴적토 및 뒷채움토에서 확인되는 기와편 외에도 남쪽 그리드 수축 성벽의 내벽을 중심으로 인접한 위치에서 주름무늬병, 편구병, 대부완, 대호가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유물들은 대체로 통일신라시기(8~9세기)의 유적들에서 공반 출토되는 기물들이다.

특히 남쪽 그리드 남측 내벽과 인접하여 출토된 대호는 저장시설 혹은 제의시설의 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명확히 확인하기 위해서는 주변부에 대한 추가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8. 금번 2차 학술발굴조사는 2차 학술시굴조사시 확인된 성벽의 일부분에 대해서만 진행되었기 때문에, 성 내부 시설을 거의 확인할 수 없었으며, 현재까지의 조사결과를 통해서 오두산성의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앞으로 성벽부에 대한 추가조사를 진행하여 진행방향, 출입시설의 유무 및 구조, 규모 등을 살피고, 산성 내부와 군시설 교란 지역에 대한 조사를지속하여 자료를 계속 축적한다면, 추후 진행될 오두산성의 보존 및 정비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조사단 의견
금번 2차 학술발굴조사 결과, 오두산성 성벽의 축조 방식을 기존보다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었다.
 
1991년과 2006년 등 기존의 조사내용에서 진일보하여, 성벽의 내벽 상부 부분을 포함한 구조의 일단을 확인하였다.
 
이번 발굴조사 지역에 위치한 성벽은 초축 이후 최소 1~2차례의 수축과 보축과정을 거쳤음이 조사결과 밝혀졌다.

성벽의 축조는 상부의 경우 내외협축으로, 하부의 경우 자연암반을 비스듬하게 굴착하고 정지하여 면석을 쌓은 구조(외탁)였다. 

성 내벽의 구축 시에는 등간격으로 고정주를 설치하여 성벽의 축조를 보조하였다. 고정주는 내벽 외측으로 20~30㎝ 정도 이격하여 굴착하였으며, 이는 1차 발굴조사 시에 확인된 영정주 초석이 벽석 사이 사이에 위치하는 것과 비교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것이 성벽의 시기차이에 따라 축조방식이 변화하며 나타난 현상인지, 혹은 구조물 자체의 차이에 따른 원인에 의해 나타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1·2차 발굴조사지역 사이 부지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확인해 봐야 할 것이다.

북쪽 그리드에서 확인된 배수구는 성 내벽쪽의 구조를 살펴 집수시설이 위치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리고, 성벽 교차부에 대한 노출조사를 통해서 오두산성의 구조가 기존의 조사결과에서처럼 내성·외성의 구조로 축조된 것이 아니라, 초축과 수축의 과정에서 형성되었으며, 수축시에는 기존성벽을 최대한 이용하였음을 밝혔다.

이상의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실시된 학술자문회의에서 초축과 수축 2개 성벽의 진행방향과 구조, 성 내부 유구의 잔존상태, 기존 조사에서 확인된 성벽 기초부와의 시기 및 성격 차이 등을 밝히기 위해서 현재 설정된 조사지역 외곽으로 추가적인 확장 조사의 필요성이 개진되었다.

따라서 초축과 수축성벽의 교차부 및 추정 저장공 혹은 제의시설이 확인되고 있는 남쪽 그리드의 동쪽과 남쪽지역을 중심으로 추가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성벽의 진행 양상과 구조, 그리고 건물지, 저수지, 저장시설 등 성내 유적을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