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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를 보다가 재밌는 기사를 발견했다. 나라 망하기 한 달쯤 전인 1910년 7월 26일자.
이 시절 작은 집 한 채는 200환이면 살 수 있었다.
요즘 고미술품 가게에 가끔 나오는 홍패 가격을 생각하면, 이 심구택이라는 사람은 순진한(?) 일본인을 얼마나 벗겨먹으려고 한 건지.
그런데 아무래도 이게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나흘 뒤 7월 30일에는 일종의 해명기사가 나온다.
"낭설이라더라."
이 시기 신문은 거의가 '카더라 통신'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기사 끄트머리가 꼭 "~라더라"로 끝나기 때문이다.
거 참 묘한 어조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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