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는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 대목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三十七年春 始奉源花"
이해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누구를 원화로 삼았는지가 보이지 않는다. 언뜻 보면 원화가 사람 이름 같다.
《해동고승전》에는 이렇다.
三十七年, 始奉原花爲仙郞
이해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어 선랑으로 삼았다.
이걸 보면 역시 원화가 사람 이름 같다. 선랑은 직책이다.
《삼국유사》엔 이런 말이 나온다.
國史 眞智王大建八年丙申 始奉花郞 恐史傳乃誤
국사에 이르기를 진지왕 대건 8년 병신년에 처음으로 화랑을 받들었다 했지만 아마도 역사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를 대표하는 제도 화랑은 실은 특정한 무리를 일컫는 우두머리, 특히 남자를 말한다.
역사에 따라 그 명칭도 변동했으니 풍월주風月主라 하기도 하고 그 분열기에는 따로 떨어져 나간 군사 색채가 무리 우두머리를 국선國仙이라 칭하기도 했다.
선랑仙郞은 이 화랑이 이끄는 집단이 애초엔 천사도 계열 오두미도 도교집단인 데서 비롯한 우두머리를 일컫는 일종의 대표직책 명칭이다.
가장 널리, 그리고 가장 오래 보편으로 사용한 명칭이 화랑 혹은 풍월주였다. 풍월주라는 이름은 이 집단이 지향하는 종착점이 도교 지향 종교집단임을 지칭한다.
도교는 애초 교단으로 성립할 적에 군사집단 색채를 강하게 띠었으니 첫째 그 원류가 묵자 교단인 데서 말미암으니 묵자는 수공업자, 특히 무기를 만들던 사람들이 주축이 된 공성攻城 집단이었던 데 그 원인이 있고
둘채 후한 시대 말엽의 대혼란기에 현실도피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쿠데타를 통해 혁명을 꿈꾼 자들, 예컨대 황건적 무리 같은 데를 뿌리로 삼은 데서 비롯하니
그런 까닭에 도교는 태생 자체가 노장을 절대 경전으로 삼는 산천득도파이면서 언제건 군사집단으로 전환이 가능한 속성이 있다.
애초 신라엔 화랑 전신으로 여자들이 이끄는 여성 집단 조직이 있어 그 우두머리를 일러 원화라 했으니 原花 혹은 源花라 쓰기도 한다.
이걸 일곱살 자기 아들 꼬맹이 진흥을 왕좌에 앉히면서 권좌를 장악한 지소태후가 남자 중심 조직으로 재편하고는 그 우두머리를 화랑이라 하는데 이 화랑이 졸라 어리고 미남자라 하는 일은 실상 밤마다 과부가 된 지소를 위해 코피 흘리는 일이었다.
이것이 진흥왕 말년에 오면서 개판 일보 전이 되는데 심지어 화랑이 아주 폐지되고 원화가 부활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들이 이를 용납치 아니해서 다시 화랑이 부활하는데 그걸 이끈 이가 설원薛原이었다. 원효의 고조가 되는 설원은 나중에 개명하고는 아예 이름조차 화花가 되어 그를 높일 적에는 郞을 붙이곤 했으니
그가 바로 설원랑 설화랑이라 하는 인물이다.
그는 화랑을 부활한 원훈대신이다. 화랑 역사에서는 불천위 중시조 같은 인물이다.
진흥왕 말년, 그가 화랑에 취임하니 이는 실제 부활이었다.
각종 사서에 진흥왕 말년에 마치 화랑이 창설된 것처럼 기술된 이유가 바로 이에서 말미암는다.
이런 역사를 통괄하면 저 《삼국사기》 《해동고승전》은 저런 제도 변천에 어두운 사가들의 실책임을 단박에 알 수 있으니
"始奉薛原爲花郞"
이것이었다.
진흥왕 37년에 비로소 설원을 화랑으로 받들었다.
이것이었다.
저 한 줄로써 화랑 창설을 둘러싼 모든 의문이 봄눈 녹듯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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