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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고관대작들의 참전, 신라와 조선의 갈림길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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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당시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 때 공을 세웠다 해서 문관들에게 발부한 1604년 호성공신 교서. 이항복은 정곤수와 더불어 1등에 책봉된 두 명이며, 윤두수 윤근수 형제와 이원익 류성룡은 2등에 이름을 올렸음을 본다. 이때 무관 역시 선무공신이라는 이름으로 책봉되게 되는데 이순신과 권율 원균 셋이서 1등에 책봉되었다.

 
전쟁에 대한 대응체계에서 저 두 왕조는 왕청난 차이를 보이니

간단히 말해 신라는 전장터에 일단 고관대작은 물론이고 그 자제들도 다 튀어나갔지만

조선왕조에서 그리한 놈은 단 한 놈도 없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조선왕조의 호종공신扈從功臣[호성공신扈聖功臣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존재다.

역사를 통털어 여러 가지 이름으로 변종하는 호종扈從이란 간단히 말해 임금님 곁을 지킨다는 뜻이라 이 호종공신에는 결코 무장이 책봉될 수는 없다.

무인은 총칼 들고 전장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왕조는 시스템이 달랐다.

무엇보다 신라는 후기엔 독서삼품과니 해서 조금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나 상고기 이래 적어도 일통삼한 전쟁과 나당전쟁기까지는 출입장상出入將相 시스템이라

예외가 있긴 하겠지만 국무총리 이하 장차관이 모조리 유사시엔 장군으로 출정했다.

김유신을 예로 들지 않더래도 그런 중앙 조정 고관들이 유사시엔 모조리 대장군이고 장군으로 최일선에 섰으며

그 자제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전쟁이 나면 모조리 아버지 따라서 중간급 장교로 출정했으니 황산벌 전투에서 죽은 반굴과 관창이 대표적이었다.

자제 뿐만 아니라 노비들도 주인 따라 전장터로 달려갔다.

이런 전통은 고려 전기까지도 계속되거니와 무엇보다 후삼국 통일 과정이 무장들의 시대였다.

이를 변모한 결정적 사건이 쌍기의 건의에 따라 광종시대가 채택한 과거제 도입이었다.

고려시대 과거제 도입과 그 운영을 우습게 바라보는 시각도 없지는 않아, 무엇보다 음서제가 성행한 사회라는 그릇하는 인식에 토대한다. 

하지만 천만에. 이 과거제 도입을 통해 고려왕조는 이른바 문관만 주구장창 매년 서른 명인가를 뽑았고, 그것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현종 이전에 이미 중앙 정치 무대는 이들 과거를 통한 문관들이 요직을 독직하는 시스템으로 정착했다. 

이 과거제는 관리 운용 시스템에서 문관과 무관을 가른 결정판이었는데, 과거를 통해 입신한 사람으로 장군으로 혁혁한 성과를 낸 이가 고려 왕조에서는 더러 있어 고려 거란 전쟁 당시의 영웅 강감찬과,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이 대표적이었다. 

이는 이내 무관들의 반란을 불렀으니, 우리가 말하는 무인정치 시대에 앞서서도 무관들의 쿠테타는 끊이지 않은 사실이 이 시스템의 효율성은 물론이고 모순성까지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이런 고려시대 과거 시스템을 계승한 조선왕조는 문무文武 분리를 더욱 고착화했으니, 물론 세종 시대 김종서 같은 예외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후에는 아예 문무를 겸한 재상은 거리가 멀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임란과 병란이라는 그 미증유한 사태를 저 신라시대랑 비교하면, 고관대작은 물론이고, 그 자제로 전장터에 나아가 총칼을 든 이가 없다. 

병자호란 때인가?

해남에 은거하던 윤선도는 전쟁통에 임금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서울로 달려가다가 사태가 진정됐다는 말을 듣고선 곧바로 해남으로 되돌이했다가 이것이 두고두고 훗날 반대측 공격 빌미를 제공했으니,

그 공격 논리를 보면 우습기 짝이 없어 신하된 도리로 임금을 호종하지 않았다 해서다!

총칼을 들어, 예컨대 의병을 일으키지도 않았다는 죄목이 아니라 임금을 호종하지 아니했다 해서 두고두고 씹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저런 전쟁이 나서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러서도 어느 누구도 고관대작은 물론이고, 그 자제로서 총칼 들고 전장터로 달려간 이가 없다. 

아 물론, 저에서 벗어난 몇 사람, 예컨대 곽재우 같은 이가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들고 일어나기는 했으나, 그는 선비였을 뿐, 고관대작도 아니었을 뿐더러, 벼슬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저 임란 병란 양란에 중앙 조정에서는 임금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총칼을 들고 일어나라는 호소문이 내려오지만 어느 누구도 호응하지 아니했고, 그나마 현직에 있는 관리들로 중앙 요직에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문관이라 우리가 할 일은 임금님 꽁무니 따라다니기라 해서 임금이 의주로 가면 의주로 쫄쫄 따라가고, 평양으로 가면 평양으로 쫄쫄 따라다니면서 그걸로 忠을 다했다 해서 전쟁이 끝나고선 호성공신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포상을 받아 떵떵거리며 살았다. 

그러니 조선 왕조에서는 중후기로 접어들면서 전쟁이 나도 전쟁에 나설 군인이 없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만다. 

임진 병란 직후에는 그 혼란 때문에 넒나듦이 있겠지만, 조선 왕조는 이미 숙종 영정조 시대에는 인구가 천만을 넘겼을 텐데, 이 천만 인구 중에 변변찮은 군인 하나 없는 사회가 되고 만 것이다. 

과거제 도입은 전쟁은 군인이 하며, 실제 국가 통치는 그와는 상관 없는 우리 먹물 문관이 오롯이 한다는 시스템을 정착했다는 점에서 한국문화사 획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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