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만인소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석들을 하는 것을 보는데,
물론 유네스코 기록유산이 되면 좋은 게 좋은 것이니 그런 프로파간다고 필요하겠지만,
만인소에 대해서는 좀 더 비판적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앞에서 썼듯이 만인소를 올린 이들이 향촌사회에서 정체성이 뭐냐 하는 것이다.
이들은 향촌의 사족이지만 19세기 중반이 되면 이미 유학 하나 간신히 유지하는 것 정도로는
이른바 모칭 유학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 결과가 바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라,
대원군은 서원철폐 때 향촌 사족들이 서자들을 때려 잡을 때 하던 말 그대로,
"놀고 먹는 놈들이 백성들을이나 괴롭히고 있다"
"너희는 서원이 아니면 책 읽을 곳도 없느냐"며 모욕적인 말을 날리며
전국 그 많던 서원을 싹 다 밀어버리지만,
이에 대해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할 정도로 향촌 사족들은 약해져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이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네트웍을 가진 뼈대 있는 사족이건 뭐건 간에
이미 19세기 중엽이 되면 호적을 보면 유학 정도는 동네에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으니,
그 유학이 진짜 유학 가짜 유학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국가에서 모칭 유학이나 뼈대 유학이니 그놈이 그놈이라고 이미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필자는 생각건대 아마도,
이 만인소를 준비하고 있을 때 동네에서 모칭유학들은 빼고 청금록이나 들어가 있는 이들 중심으로 통문을 돌렸을 것이라 짐작하는 바,
그렇게 해 봐야 막상 만인소를 준비할 때는 진사 생원도 적지 못하고 죄다 유학으로 적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시 향촌 사족이라는 것은 스스로들 생각과는 무관하게 어느 쪽이나 별 차이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만인소에 대한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만인소를 "백성의 소리"라 평가하지만,
만인소가 주장하는 내용은 결코 백성의 소리라 미화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도세자 추숭을 주장하고,
조선책략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서원철폐를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어떻게 백성의 소리가 될 수 있겠는가.
그 당시 유학을 만명 모았으면 그것이 백성의 소리일까?
필자가 호적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19세기 중엽 당시
경상도에만 유학은 수십만은 있었을 것이다.
그 경상도 땅의 유학 수십만 중에 만명의 의견이 만인소일진대,
나머지 19만명의 의견도 들어봐야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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