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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야기

19세기- 일어나는 서북의 사족들

by 신동훈 識 2026.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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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반 서북 지방을 휩쓴 홍경래의 난 영향 지역

 

대개 서북지역, 평안도 일대라고 하면, 

택리지에 있는 서북지역에 대한 평가, 

이 지역에는 제대로 된 사족이 없다는 시각에 입각해 이 지역을 바라보며,

홍경래의 난에 대한 배경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항상 오르내리는 

이 지역 사족은 심지어 노비들도 무시한다고 하는 서북차별론을 항상 거론하는데, 

서북의 사족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 주장은 일부는 맞지만 틀린 부분도 많은 인식이다. 

먼저 조선 전기-중기까지 서북지역 사족이 별볼일 없었다고 한다면, 

이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조선후기가 되면 이 지역이 큰 변화를 일으키니, 

이 지역에서 문과 급제자가 무수히 많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서북지역, 평안도 지역 문과 급제자는 평양, 안주, 정주 세 곳에서 가장 많이 나왔는데, 

그 시기는 18-19세기에 집중한다. 

이 시기에 서북지역 문과 급제자가 얼마나 많았는가 하면, 

이 지역 문과급제자 숫자가 경상도 보다 더 많았다고 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전통적으로 서울을 제외하면 경상도 문과급제자를 다른 지역이 앞선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유일한 예외가 바로 19세기 서북지역 문과 급제자 숫자로서

이 시점에 경상도 문과급제자보다 더 많은 문과급제자가 평안도에서 쏟아져 나와, 

경상도를 위시하여 전라도, 충청도 보다도 훨씬 많은 사족이 대과 급제를 했다. 

따라서 19세기가 되면 평안도가 사족이 없다는 택리지 시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홍경래의 난도 그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번 다시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홍경래 난의 원인으로 대과급제자는 많지만 정작 고위층 관직을 얻어 나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것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고도 하지만, 

이건 평안도 만의 문제가 아니라 삼남지역도 모두 마찬가지로, 

서울의 소위 경화사족을 제외하면 대과 급제해봐야 개털이기는 평안도나 다른 지역이나 전부 마찬가지였다는 말이다. 

이 시점, 18-19세기 평안도 지역 사족의 흥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주 글을 쓸 것인데, 

이 지역의 19세기 동향이 정말 의미 심장하여 

그 흐름은 구한말,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 이후 남북한의 동향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전개되니

이 부분에 독자분들은 주목해 주기 바란다. 

19세기 평안도 동향은 단순히 이 지역의 서북차별이라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상당히 많고,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지역에 대한 기본적 인식도 틀린 것이 많다는 점, 

기억해 두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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