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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21세기 경주 농경지 구획은 천오백년 전 신라시대 도시구획이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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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분지 중앙을 기준으로 동쪽에 정좌한 낭산은 해발이라 해 봐야 기껏 99.5m에 지나지 않는 야산이지만, 신라시대에 신성히 여긴 곳 중 하나라, 그런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았으니 선덕여왕릉을 중심으로 사천왕사와 창림사, 능지탑, 그리고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그것을 웅변한다.

간단히 말해 그 반대편 서악 선도산이 그렇듯이 이곳 역시 귀신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 능선을 중심으로 사후 추념 공간이 집중으로 들어섰다.

다만 그 주변 일대가 구체로 어떤 양상인지는 제대로 된 조사가 없었으니, 이걸 일변한 것이 신라시대에는 황복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간주하는 주변 구역에 대한 조사였다. 이건 자료를 뒤져봐야겠지만, 예서 그럴 계제는 아니고 본론에는 벗어나므로, 2000년대 이래 경주시에 의한 발굴조사가 착수되어 상당한 진척이 이뤄졌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기로 한다.

경주시가 조사의뢰한 데는 성림문화재연구원이었으니, 주로 황복사지삼층석탑 전면 들판, 논으로 집중 개간하는 진평왕릉 마주하는 평야지대 발굴이 있었으니, 그 과정에서 그 정체가 아리송한 신라시대 왕릉 흔적을 필두로 사찰 혹은 궁궐 흔적으로 간주하는 대규모 건물터 군집이 드러났으니

그런 발굴성과를 보면서 내가 흥미롭게 바라본 대목이 발굴하고 보니 눈두렁이나 배수로를 필두로 하는 21세기 농경구획이 놀랍게도 신라시대 그것과 소름끼칠 정도로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앞에 첨부한 발굴 현장 양상을 보라! 신라시대 건물 주축선을 따라 농경로와 논두렁, 그리고 배수로가 형성돼 있음을 본다. 난 이 장면을 보고는 기겁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당시 농경지 구획양상, 혹은 도시 구획 양상을 토대로 신라시대 왕경 모습을 그려낸 1920년대 일본 고건축학도 후지시마 가이지로 혜안을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그의 접근 방식을 옳았다. 그 옳았음을 이 황복사지 주변 일대 발굴이 다시금 확인한 것이다.

이 점이 발굴조사단에서는 어찌 지적됐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아마 2018년에 성림에서 작성한 황복사지 주변 일대 도면일 텐데 저 윤곽선이 지금의 그대로 논두렁이요 농경로이며 배수로다. 다시 말해 지금의 농경구획이 바로 신라시대의 직접 유산이라는 점이 믿기는가?

이런 양상은 서울 사대문안에서도 그대로 확인하거니와, 지금의 서울 구심 도시구획은 파 보면 14세기 혹은 15세기 조선시대 전기의 그것이라는 점이 단박에 드러난다. 여전히 개발이 이뤄지지 아니하는 근대 구역들을 보면, 파보나 마나 그 도시구획이 바로 600년 전 조선전기 도시구획이다.

하긴 뭐 조선시대 내내 기자가 남긴 정전이라 해서 신주단지 받들듯 한 평양 이른바 기자정전도 고구려 흔적 아니었던가?

저 황복사지 발굴은 지금 우리가 보는 농경구획이 천400년전, 혹은 그 이상 올라가는 신라시대 도시구획 그것이다.



이 위성사진이 지금의 황복사지 일대라 석탑 맞은 편에 나대지로 보이는 데가 발굴조사가 이뤄진 곳임을 표시한다. 저에서 보이는 논두렁 밭두렁 배수로 농경로가 바로 신라시대에도 저랬다.




고고학 조사에서 주시할 점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나는 매양 문화재는 켜켜한 역사의 온축이요, 그 출발은 언제나 지금 이곳을 기점으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거니와,

함에도 많은 문화재현장에서는 여전히 정체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원형이라는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창건 당시 그 시점을 원형으로 간주하며 이후 무수한 개보수를 쳐내야 할 옹이로 간주해 쳐내버리는 현실을 분통한다.

역사는 언제나 그 출발선이 현재, 그리고 이곳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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