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춘정집春亭集에 실린 두 표문은 조선 세종 시대에 조선왕이 중국 명나라 황제한테 보내는 호소문이라,
문맥을 보면 빤해서 중국에서 조선에 대해 금과 은을 조공품으로 요구했으나, 조선 사정에서 이를 도저히 맞출 수 없으니, 이를 혜량해 주십사, 금은 대신 다른 토산품으로 대체케 해달라는 호소다.
이 춘정집은 사가정 서거정 등장 이전 양촌 권근과 더불어 조선 문단 영수로 군림하며 각종 외교문서는 도맡아 쓴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1369∼1430) 문집이라,
그의 사망 시점이 세종 12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일이 세종 원년~12년 어간에 있었을 것임을 추찰할 수 있고
나아가 이 무렵 세종실록을 훑으면 구체로 언제적 일임은 적출할 수 있으리라 보거니와 처절한 조선 사정을 짐작하는 데는 더 없이 요긴한 증언이라 할 만하다.

저 시대 하도 저런 일로 중국에 시달린 그 반발로 그것을 반전한 영화 신기전이 있거니와,
이 신기전은 요새로 치면 조선이 원자폭탄을 발명해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중국을 발 아래 굽힌 것으로 처리했지만 국뽕 정신 가득한 영화는 영화일뿐, 공상에 지나지 않아서 실제는 변계량이 증언하는 이 형국이었다.
물론 이런 외교문서는 왜곡 과장이 있을 수밖에 없어 저 문서가 말하는 사정이 당대 현실을 100프로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절박하다 하겠다.
저를 보면 여실히 드러나겠지만, 조선 땅에는 금은이 나지 않았다.
물론 아주 나지 않았느냐 하면 그건 또 따져봐야겠지만, 조선은 금광 은광이라 해서 제대로 개발한 적도 없고, 그런 광산을 개발할 능력도 없었고, 설혹 그런 광산을 발견했다한들 그런 광물을 채굴할 기술조차 없었다.
이것이 엄혹한 당시 사정이다.
물론 금의 경우 삼국시대 이래 그 주종은 사금 채취였으니, 금맥을 찾았다는 증언이 삼국유사 그 유명한 무왕과 선화 공주 이야기에 보이기는 하지만, 이건 꿈이었지 현실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금과 은이 나지 않으니 제발 금은을 바치라 하지 말고 다른 토산물로 교체케 해달라는 요청은 거의 현실을 반영한다고 봐야 한다.
객설이 길었다. 두 번의 표문 원전을 그대로 전재한다.

춘정집 제9권 표表·전箋
금은金銀의 조공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표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사람을 매우 사랑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이나 자식이 정말 다급한 사정과 고통의 괴로움이 있을 경우 반드시 황급히 하늘이나 아버지를 부르면서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는데, 이는 천하의 상리常理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하늘과 아버지처럼 사해四海의 안팎에 군림하여 만물로 하여금 모두 삶을 이룩하여 일개 서민 남녀라도 자신의 구실을 다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에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데도 혼자 걱정하고 답답해한 채 위에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폐하를 하늘과 부모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한 번 말씀드리는 바이니, 폐하께서는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토질이 척박하여 금은金銀이 생산되지 않는데, 이는 천하에서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5년 10월에 중서성中書省에서 하교를 받았는데, 그 하교에 “예로부터 멀리 변방에 떨어져 있는 나라들이 바치는 것은 예물로 정성을 표시하는 데에 불과하였다.
앞으로 그들이 조공하러 올 때 그 지방에서 나는 베 3, 5대對를 넘지 않게 하여 성의를 표시하기에 편리하게끔 하고, 그 외에는 모두 가지고 오지 말도록 하라.”고 하셨으며, 7년 정월 초하룻날에 이르러 베만 받아들이고 그 밖에 금은의 그릇은 모두 되돌려 보냈습니다.
이는 대체로 고황제께서 만 리를 훤히 내다보아 우리나라에 금은이 생산되지 않는 것을 잘 아셨기 때문이니, 실로 우(禹) 임금께서 그 지방에서 나는 물건으로 조공을 바치게 하신 의의와 똑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옛날의 성인(聖人)이나 후세의 성인이 그 궤도는 같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 때 원元 나라 상인들이 장사 목적으로 가지고 온 사소한 금은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옛날 그대로 바쳐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수십 년 간에 쓸 대로 다 써 버려 국고國庫가 이미 바닥이 났고, 심지어는 집집마다 거두어들이는 바람에 온 나라 가정에 소장된 금은이 하나도 없으므로 사세가 매우 궁색해졌습니다. 이때문에 신이 침묵을 지키지 못하고 고충을 피력하여 천자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이 또 스스로 생각해 보니, 신의 할아버지 강헌왕康獻王께서 특별히 고황제의 은총을 받아 이미 왕작王爵을 허락받았고 또 나라의 이름까지 하사받았는가 하면, 신의 아버지 공정왕恭定王과 신도 잇달아 고명誥命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3대가 지금 40년이 되도록 융성한 총애와 빈번한 포상이 내리지 않은 해가 없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사서史書를 상고해 봐도 우리나라가 오늘날처럼 성은聖恩을 입은 적이 없었습니다.
신이 성은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을 잠시도 잊지 않았는데, 어떻게 감히 있는 금은을 없다고 핑계 대면서 일정한 조공을 폐지하고자 폐하를 기만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이 말은 실로 충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황천의 상제와 산천의 귀신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곁에서 주시하고 있는데 신이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신이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신의 번거로운 말을 용서하시고 신의 절박한 심정을 가련하게 여기시어 멀리는 우 임금의 좋은 제도를 상고하고 가까이는 고황제의 말씀을 이행하여, 천지가 사람을 사랑하는 인仁을 본받고 부모가 자식을 보호하는 마음을 미루어 특별히 윤허를 내려 금은의 조공을 면제하는 대신 토산물을 바치게 해 주소서.
그러면 어찌 신과 일국의 신민臣民, 부로父老만 성화聖化의 가운데서 환호하고 기뻐 춤추겠습니까.
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령도 구천九泉에서 감읍할 것이고, 신의 자손 대대로 천만세까지 깊은 자애와 후한 은택을 영원히 입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제폐하께서는 조금이라도 살펴주소서.
ⓒ 한국고전번역원 | 송수경 (역) | 1998
춘정집 제9권 표表·전箋
금은의 조공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전
삼가 생각건대, 높은 곳에 있어도 아랫사람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은 성인의 큰 도량이고, 소회所懷가 있으면 숨김없이 말하는 것은 신하의 지극한 마음이라고 여깁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토질이 척박하여 금은이 생산되지 않는데, 고황제의 명철함으로 이를 잘 아시고 칙지를 내려 면제해 주셨으며, 헌납한 금은의 그릇을 되돌려 보내기까지 하셨습니다.
다만 고려 말엽에 원 나라 상인이 장사 목적으로 가지고 왔던 남은 금은으로 겨우 지금까지 그대로 바쳐 오다 보니, 관청이나 개인이 소장한 바가 하나도 없이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목전의 급박한 상황에 처하였으니, 감히 고충을 피력하여 우러러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제의 은택을 인도해 베풀어 특별히 금은의 조공을 면제해 주시고 그 대신 다른 산물産物을 바치게 해 주심으로써, 위아래의 마음이 상통하게 하고 먼 변방 사람들의 소망을 위로해 주소서. 이것이 신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송수경 (역) | 1998
***
더불어 저 증언이 어느 정도 당대 사정을 절실히 반영했다 가정할 때 조선의 폐쇄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고려왕조 때 금은은 무역을 통해 조선에 유입됐으나 조선왕조 건국은 그 무역을 막아버려 외부에서 자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 쇄국 정책은 조선왕조를 오백 년 내내 발목을 잡는다.
거지나라 조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저 표문은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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