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연의] 즉 소설 [삼국지]에서 관우關羽가 타고 다닌 명마는 바로 적토마赤兔馬다.
소설에 의하면 적토마는 본래 여포呂布가 타고 다니던 천리마로 여포가 조조에게 사로잡혀 처형된 뒤 조조에게 귀속되었다.
그러다가 관우가 유비, 장비와 헤어져 잠시 조조에게 몸을 의탁했을 때 조조가 관우를 자기 심복으로 삼기 위해 적토마를 관우에게 하사했다.
관우는 조조가 자신에게 다른 선물을 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적토마를 주자 두 번 절하며 매우 기뻐했다.
그는 하루에 천 리를 가는 적토마를 타고 자신의 의형義兄 유비에게 빨리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나중에 관우가 오나라 반장潘璋의 부장 마충馬忠한테 생포된 뒤 여몽呂蒙에게 압송되고 참수되자 적토마는 전리품으로 간주되어 마충에게 귀속되었다.
그러나 적토마는 그때부터 자신의 주인 관우를 잊지 못한 듯 먹이를 먹지 않다가 결국 굶어죽었다.
소설 [삼국지]의 이 이야기는 한갓 짐승에 불과한 말조차도 주인을 위해 의리를 지켰다는 스토리로 승화되면서 ‘적토순주赤兔殉主’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이익에 따라 국민을 배신하는 짐승보다 못한 인간은 또 얼마나 많은가?
지금 남아있는 소설 [삼국지] 첫 번째 판본인 [삼국지평화]의 기록은 이와 조금 다르다. 여포의 부하 후성侯成이 여포와 불화하여 여포의 적토마를 훔쳐타고 서문으로 탈출했는데, 성밖에서 순찰을 돌던 관우가 후성을 사로잡고 적토마를 얻었다는 것이다.
즉, 조조가 여포에게서 적토마를 노획하여 관우에게 선물로 준 것이 아니라, 관우가 직접 여포의 부하 후성에게서 노획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 적토마는 관우가 탄 것으로 짐작되지만 관우가 죽은 뒤 적토마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정사 [삼국지]에도 적토마에 관한 기록이 있을까?
[삼국지] 권7 <여포전>에 “여포에게는 적토라는 좋은 말이 있었다.[呂布有良馬曰赤免.]”라는 기록이 있고, 배송지는 이 대목에 [조만전曹瞞傳]을 인용하여 “사람 중에는 여포가 있고, 말 중에는 적토마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免.]”라는 주注를 달았다.
즉 정사에도 여포가 적토라는 명마를 탔다는 기록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뿐이다.
이후 여포가 죽은 뒤 적토마는 어디로 갔는지, 누가 노획했는지, 그 최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여포를 이어 관우가 탔던 말이 적토마라는 사실도 정사 [삼국지]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한데 흥미롭게도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적토마를 탄 사람이 여포, 조조, 관우 이외에도 또 한 명이 더 등장한다.
제갈량이 남만南蠻의 맹획孟獲과 싸우는 제90회에 남만 여걸 축융부인祝融夫人이 적토마를 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우가 죽은 뒤 스스로 먹이를 먹지 않고 아사한 적토마가 남만 땅에서 다시 부활한 것일까?
이에서 더 나아가 [삼국지연의]와 함께 명나라 4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꼽히는 [수호전水滸傳]에도 적토마가 등장한다.
양산박의 다섯 번째 호걸인 관승關勝의 말이 바로 적토마다.
심지어 [수호전]에서 관승은 관우의 직계 후손으로 묘사되는데, 관우처럼 구릿빛 얼굴에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라는 큰 칼을 썼기에 ‘대도大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본래 적토마는 관우의 명마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뛰어난 말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였음을 짐작케 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적토마를 가리켜 “온 몸은 붉게 타는 숯처럼 적색이고 그 모습은 위풍당당하다.”라고 묘사했으며, 소설 [삼국지평화]에서는 “온 몸에 피 얼룩과 같은 선홍빛 반점이 있고, 갈기가 불꽃 같아서 적토마라고 부른다.”라고 했다.
또 “(사람이 토끼를 사냥할 때 적토마가) 토끼를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날래고, 이 과정에서 사람이 토끼를 활로 명중시킬 수 있기 때문에 석토마射兔馬라고도 한다.”라고 했다.
‘사射’를 ‘석’으로 읽을 때는 ‘화살을 쏘아 목표에 명중시킨다.’는 뜻을 가진다.
실제로 중국 후난湖南 창사長沙 마왕두이 3호분馬王堆三號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백서帛書 [상마경相馬經]에는 토끼 머리와 토끼 어깨와 같은 모습을 한 말을 명마라고 했으므로 한나라 초기에 이런 모습의 붉은색 말을 적토마라는 일반명사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중국 민간에서 이런 인식이 강화하면서 정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에서 여포와 관우가 타는 명마를 고유명사화하여 적토마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모두 정사 [삼국지]의 빈 틈을 민간 전설과 상상의 세계가 메운 결과인 셈이다.
그렇다면 주인을 위해 의리를 지키며 목숨까지 바친다는 적토마의 형상은 어디에서 연원했을까?
바로 떠오르는 것이 [초한지]에 나오는 항우項羽의 명마 오추마烏騅馬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는 항우가 늘 우미인虞美人을 데리고 다녔으며, ‘추騅’라는 준마를 탔다는 기록이 있다.
‘추騅’라는 준마는 검푸른 털에 흰 털이 섞인 말이기에 흔히 오추마烏騅馬로 불렸다고 한다.
항우가 우미인을 위해 부른 마지막 이별의 노래 <해하가垓下歌>에 나오는 바로 그 명마 ‘추騅’다.
[사기] <항우본기>에 의하면 한고조 유방의 군대에 참패하여 오강烏江까지 밀린 항우는 오강 가에서 강을 건너게 해주겠다는 정장亭長의 제안을 받는다.
하지만 항우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장강을 건너올 때 강동의 8천 자제와 함께 왔는데, 지금 한 명도 살아오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강동의 부형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자신이 타던 준마 ‘추騅’를 정장에게 주었다.
이후 ‘추騅의 마지막 모습은 [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명나라 소설 [서한연의西漢演義]에는 오추마가 정장의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몇 차례 길게 울고는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적토마가 관우를 위해 곡기를 끊고 아사했다고 묘사한 내용은 소설 [서한연의]에서 오추마가 항우를 위해 강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고 묘사한 내용과 이곡동공異曲同工의 묘가 있다.
기실 일종의 패러디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명나라 유명한 문학가 풍몽룡馮夢龍의 단편소설집 [유세명언喩世明言]에 실린 <요음사사마모단옥鬧陰司司馬貌斷獄>이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중국 삼국시대의 관우가 초한시대 항우의 환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적토마가 오추마의 환생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것은 사실에 기반한 정사正史의 영역이 아니라 상상에 기반한 소설의 세계다.
***
이상은 이달 중 배송지 주를 포함한 정사 삼국지 완역본을 내어놓는 김영문 선생 글이라 업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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