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흔히 말하는 ear rings은 그 매다는 방식에 따라 귀걸이와 귀고리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귀걸이는 귀에다가 걸 때 쓰는 말임은 명약관화하지만 귀고리는 이 경우에는 뚫은 귀에다가 박은 형식이라 해둔다. 그런 점에서 후자는 귀뚫음 장식이라 할 만하다 하겠다.
암튼 그 매다는 방식에 따라 뚫은 귀에다가 박는 형식과 귀는 박지 않고(혹은 뚫었다 해도) 무엇인가 끈 같은 데다가 매달아 귀에다가 걸치는 형식 두 가지로 나누기로 한다.


물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방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리 크게 농가봐도 무리는 없으리라 본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라의 대충대충하는 공예를 봤다.
신발? 금관? 허리띠?
따져보면 대충대충 만들었다.
물론 이 대충대충이라는 말에 분개하는 사람이 많더라만, 그 대충대충주의는 정성이었다. 흉내내기였다.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니, 죽은 사람을 위한다는 흉내내기, 그런 정성을 표시한다는 뜻에서 일부러 죽은 사람을 위해 넣어주는 껴묻거리는 그리 만들어 주곤 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꼭 대충대충 흉내만 낸 것만 넣어주겠는가? 각 잡고 제대로 만든 것을 넣어주기도 한다.

바로 이 귀걸이가 그에 해당한다.
경주 보문리 부부총이라는 무덤에서 출토한 6세기 신라시대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이 무덤 조사를 두고 말이 많지만, 그런 것들을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제끼자.
대충대충 만든 신라사람들이 각잡고 제대로 만들면 이렇게 만든다.
저기에 박은 금알갱이만 해도 저걸 일일이 세어본 이한상 선생 전언에 의하면 3천 개를 넘는다 한다.
화려하잖아?
이것이 신라다. 대충대충 만들면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각 잡고 만들면 저리 나온다.
남산신성비에서 읽어야 할 것은 신라의 대충대충 얼렁뚱땅주의다
https://historylibrary.net/entry/7-57
남산신성비에서 읽어야 할 것은 신라의 대충대충 얼렁뚱땅주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신라 왕조는 진평왕 13년, 서기 591이 되어 그 왕궁 월성 남쪽을 정좌한 남산 일대에 새로운 산성을 하나 쌓으니, 이를 그들은 남산성南山城이라 불렀고,
historylibrary.net
'역사문화 이모저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남산신성비에서 읽어야 할 것은 신라의 대충대충 얼렁뚱땅주의다 (0) | 2025.11.05 |
|---|---|
| 103년 전 오늘 투탕카멘의 저주가 시작되었다 (0) | 2025.11.05 |
| 금관만? 허리띠도 접어 포개서 허리춤에 얹었다! (0) | 2025.11.04 |
| 금관이 생전에 쓰던 것이라는 망발에 대하여, 금동신발의 경우 (0) | 2025.11.03 |
| 저승으로 가는 물건은 왜 금관까지도 대충대충 대강대강 만드는가? (0) | 2025.11.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