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덕일 본인은 자신이 재야사학으로 분류된다는 데 분노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는 숭실대 사학과에서 학사 석박사를 한 정통 역사학도 길을 걸었으며, 박사학위 논문은 북한 정권 탄생 직접 도화선이라 간주하는 동북항일연군 연구, 곧 김일성 부대 동향을 성찰했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어쩌다 재야사학 대부로 군림하게 되었던가?
이덕일은 봇따리 장사다. 그 자신 대학 진학이 아주 늦었다.
본인 말을 빌리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형님을 도와 중고 철물점인가를 운영하다가 아주 늦게 숭실대 사학과로 진학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나, 그런 경력이 으레 추구하는 그런 길을 걷지는 않았으니, 그가 대신 기치를 내건 일이 역사대중화였다.
역사 이야기로 책을 쓰고 강연도 하고, 그것을 토대로 삼은 여타 부대활동을 통해 밥벌이를 하는 길을 걸었으니, 마침 시대가 그것을 요구했고, 그 요구에 정확하게 타격한 역사학 장사꾼이 이덕일이었다.
그의 시대는 역사스페셜 시대랑 정확히 겹치는데, 역사스페셜과 이덕일은 역사대중화에 정확히 접접을 이루며 새로운 역사학 산업을 개척했다.
이런 그에게 대중은, 혹은 그의 성공?을 질시하는 기존 역사학은 재야사학이라는 딱지를 씌웠다.
지금 이덕일이라는 이름은 정통 강단역사학이 그토록 경멸하는 재야사학의 대부처럼 통하고 있거니와, 종래 이 부문 월계관은 윤내현 몫이었다.
고조선 중심이 한반도 평양 일대가 아니라 지금의 요동과 요서라는 주장을 들고 나온 윤내현이 시종일관해서 저 고대사, 특히 고조선 분야로 국한해서 평양 중심설을 주장하는 기존 정통역사학과 시종해서 맞선 좁은 의미에서의 재야 강단 논쟁이었다면, 이덕일 시대의 그것은 범위를 아주 넓혀서 곳곳에서 맞붙는 모양새다.

윤내현 시대 재야사학과 이덕일 시대 재야사학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대중의 지지를 기반을 절대 존거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나, 그 투쟁방식에서는 결정적으로 갈라졌으니, 윤내현은 그 자신 아주 있는 집안 자식으로, 일찍이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아주 일찍이 단국대 사학과에 자리를 잡았으니, 그런 까닭에 경력 혹은 직업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덕일 시대 이덕일은 달라서 곧 투쟁이 그의 생존 무기였다.
윤내현은 재야사학 대부로 일컬어졌지만 그는 결코 투쟁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덕일은 달라서 태생 자체가 투쟁가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끊임없이 기존 역사학 강단과 부닥쳤고, 그때마다 죽창 들고 일어나 그들을 공격했다.
나아가 윤내현 시대 윤내현의 팬덤이 대중이기는 했으나,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소위 고조선 논설들은 일부 식자, 그리고 무엇보다 공무원 사회, 개중에서도 군과 경찰, 특히 교육부 쪽 공무원 사이에서 적지 않은 지지층을 거느렸으나 이덕일 시대 재야사학은 그와는 사뭇 달라 탈레반, 혹은 춘추전국시대 묵자 교단을 방불하는 전투력을 겸비했으니, 저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한 실력행사도 마다 않았다.
무엇보다 전선이 아주 넓어져 이덕일 시대 주된 전선은 윤내현 시대의 고조선이 아니라, 삼국시대로 확전을 거듭했으니, 이것이 지금 사정이라 곳곳에서 '이덕일들'로 간주하는 저들 묵자 교단 공격에 기존 정통 역사학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곤혹스러움을 겪는 중이다.
이덕일 시대 팬덤은 이덕일 본인은 어찌 말할지 모르겠지만, 실제 일부 권력자의 절대 지지를 등에 엎는다.
이 절대 권력 지지층 주된 포진 분야를 보면 이른바 독립운동가 그룹이 있고, 더 무서운 것은 국회다. 국회에는 저 친이덕일로 분류할 만한 의원이 적지 않다.
그나마 기존 정통 역사학을 자처하는 사람들한테는 천만 다행이었던 점은 저들 재야사학 그룹이 국가 혹은 준국가 역사관련 단체 기관장 자리에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덕일 본인만 해도, 주변에서 적당히 대학 교수 자리 꿰차고 들어가라 했으나, 그 자신은 이런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이 바뀌어 가는 양상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느낌을 나는 받곤 하는데, 이재명 발 환빠 논쟁 혹은 환단고기 논란과 관련해 기존 역사학도들은 그런 논급 자체를 다름 아닌 대통령이 했다는 데 아연실색하면서도, 혹 이런 발언들이 이덕일로 대표하는 재야사학도들의 무차별적인 자리 공격의 시발이 아닌가 몹시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동북아역사재단이며 하는 국가 혹은 준국가기관까지 재야사학에 넘어가지 않느냐 하는 공포심이 일고 있다.
그만큼 저들의 공격은 매섭고, 그간 하도 강단사학과 싸우면서 저짝에서도 투쟁하는 맛을 이미 알았으며, 무엇보다 그 최종 승리의 깃발은 결국 자리와 권력 쟁취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이제 시대는 달라졌다고 본다.
허황된 환단고기? 환빠? 재야사학?
이걸로 모든 문제가 치환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권력 쟁취를 위한 피나는 전투만 남았으며, 나는 그나마 지들끼리 민족주의 역사학입네 식민지근대화론입네 하면서 삿대질하면서도 지들끼리 분점한 역사학 권력에 새로운 제3의 변수, 바로 재야사학이 뛰어든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본다.
환단고기는 위서인가? 그 애매모호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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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僞書란 무엇인가?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 항목 설명을 보면 「1」가짜 편지.「2」=위본(僞本).「3」=위조문서.「4」남의 필적을 흉내 내어 씀.이라 하니,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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