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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유비가 제량량을 찾았나? 제갈량이 유비를 찾았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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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고초려三顧草廬에 관한 논란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유비가 남양 융중에 은거해서 살던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가서 그를 모시고 돌아와 군사軍師로 삼았다는 유명한 이야기다.

중국에서는 흔히 ‘삼고모려三顧茅廬’라고 한다.

중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몸을 낮춰 재야의 현인을 초빙한다는 고사성어로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정사 [삼국지] 권35(<촉지>5) <제갈량전>에 두 차례 언급된다.

첫째는 유비의 첫 번째 모사謀士 서서徐庶가 제갈량을 추천하면서 “제갈량은 와룡臥龍인데, 장군께서는 어찌 만나보시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자 유비가 “그대가 그를 데리고 함께 오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서서가 “이 사람은 가서 만나야지, 굴복시켜 오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고, 이에 유비가 세 번 찾아가서[三往] 마침내 제갈량을 만나 천하의 일을 자문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제갈량전>에 실린 유명한 <출사표出師表>에서 제갈량이 유비가 자신을 세 번 찾아와서 당대의 일을 물었다고 언급한 사실이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굽혀 초가집에서 신을 세 번 찾아주시며[三顧臣於草廬之中], 신에게 당대의 일을 자문하셨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말을 치달릴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제갈량전>에 배송지는 [위략魏略]이란 책을 인용하여 주注를 달았는데, 여기에는 오히려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조조가 하북을 평정하고 형주를 노리자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으나 유비는 나이 어린 제갈량을 본체만체하며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제갈량이 먼저 유표, 조조, 유비를 비교하며 유비를 자극하여 천하대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마침내 유비는 제갈량에게 뛰어난 책략이 있음을 알고 상객으로 예우했다고 한다. [구주춘추九州春秋]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고 한다.

초야에 숨어 살던 제갈량이 출세하기 위해 직접 유비를 찾아갔고, 유비가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위략]의 기록은 ‘삼고초려’에 관한 우리의 상식를 뒤엎는 내용이라고 할 만하다.

은거해 있던 현인 제갈량을 유비가 몸을 굽혀 찾아가서 당대의 일을 함께 논하고 마침내 의기투합하여 천하를 도모한다는 천고의 미담에 금이 가는 기록임이 분명하다.

[위략]은 이미 실전된 역사서이지만 위魏나라 학자 어환魚豢이 지은 책이므로 제갈량과 거의 동시대인 기록이이라고 봐야 한다.

비록 위나라 입장에서 촉한 군신의 미담을 폄훼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을 수 있지만, 아무 근거도 없이 이런 내용을 이처럼 구체적으로 기록하기는 어렵다.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 이야기는 당시에 이미 논란이 있는 일화여서 식자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략]을 인용하여 주를 단 배송지는 이렇게 논평했다.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이르기를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과분하게도 스스로 몸을 굽혀 초가 집[草廬]에서 신을 세 번이나 돌아봐주시며 신에게 당대의 일을 자문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먼저 유비에게 가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비록 듣고 본 사실에도 말이 다를 수 있어서 각각 상이한 기록을 남길 수 있지만 괴리된 내용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이상합니다.” 
 
***
 
이상은 이번 달 출간하는 정사 삼국지 전편을 배송지주까지 깡그리 완역한 김영문 선생 글이다.

선생이 말하는 저 내용은 내 기억에 세설신어에도 보인다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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