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북방개척9

이순신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를 다시 보며 일전에 소개한 적 있는 이순신의 북방 전투를 그린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다. 이 수책거적도를 다시 보면, 이 그림 주인공은 여진족도, 이를 방어하는 조선군도 아니고바로 뒤편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조선의 농부다. 성채 바깥에 펼쳐진 밭인지 논인지 이는 보는 시각에 따라 병사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둔전일 수도 있겠지만 병사가 이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구한말에는 심지어는 이런 군대의 보호없이도 농민들이 두만강을 넘어 청의 봉금封禁 지역으로 몰래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농부는 땅을 갈아 먹고 살 수 있다면 어디든 간다. 고려시대 후기 오면서 이 땅에서 마침내 혼합농경이 안정적으로 경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 결과가 북방 사민의 성공인데, 여기서 병사의 전투와 정치적 포석은사실 이 북.. 2024. 7. 19.
서울 영하 14도를 자랑하는 같은 시각 삼지연은 영하 33도를 찍는다 올겨울 들어 최강 한파라는 오늘, 그러니깐 2023년 1월 24일 오전 6시45분 현재 내가 사는 용산은 영하 14도라, 같은 시각 한국 기상청이 제공하는 북한 날씨 사정을 보니 아래와 같다. 무산이 마이너스 33도, 중강진이 마이너스 28도, 그리고 개마고원 복판일 텐데 풍산이 마이너스 31도다. 한반도 동해안은 강릉이 그렇듯이 위도랑 크게 관계없이 동시대 한반도 반대편보다 기온이 높다. 저 날씨 사정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항용 머리에서 지우면 곤란하다. 저 정기 기온이면 동물도 움직이기 힘들다. 북극곰이나 호랑이 정도나 움직이겠지만 말이다. 저 척박한 땅을 왜 한반도 역대 왕조들은 경영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을까? 가만 두면 언제나 골치가 되며, 그렇다고 직접 지배를 관철하자니 저짝을 누가 가서 .. 2023. 1. 24.
"윤관은 왜 실패했는가"에서 출발한 세종 이도의 음모 정부가 편찬한 조선 왕대별 공식 편년체 역사인 조선왕조실록 중 유독 세종실록에는 지리지가 붙어있다. 세종은 왜 이 지리지를 편찬했을까? 아니, 세종시대를 정리하며 조선왕조는 왜 이 지리를 굳이 넣었을까? 단순히 조선왕조가 개창하고서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그것을 정비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그래서 지리지 말고도 다른 志들을 편찬했다고? 나는 한국 역사상 가장 영토 야욕이 컸으며, 이를 위해서는 음모를 마다 않은 세종한테서 그 음모술수를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어떤 음모인가? 목적을 위해서는 그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명분을 동반하는 각본에 기반했다. 간단히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 논리를 만들었다. 지리지는 중국이 치고 들어올 때를 대비해 짠 시나리오다. 북방으로 진군해 4군6.. 2022. 12. 26.
함길도가 폭로하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음모 세종은 함경도를 병합하고 나면 명나라로부터 간섭이 있지 않을까 항상 두려워했던 것 같다. 윤관의 비가 두만강 건너 선춘령이라는 구절도 그렇지만, 이 땅이 역사적으로 한반도 국가의 땅이라는 점을 어떻게든 증명하려 했다. 이런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세종실록 지리지의 함경도에 대한 설명이다. [A] 함길도는 본래 고구려의 고지(故地)이다. 고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하고, 동계(東界)로써 삭방도(朔方道)를 삼았는데, 함주(咸州) 이북이 동여진(東女眞)에게 함몰되어 예종(睿宗) 2년 정해 【송나라 휘종(徽宗) 대관(大觀) 원년(元年).】 에 중서 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 2022. 12. 26.
마운령 경계선의 돌파: 월경 도망자들 그리고 이성계 앞서 마운령 경계선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갈 경우 초기철기시대 이래 오랜 기간 동안 쉽게 넘기 힘든 지리적, 인종적 한계선이었다는 이야기를 썼다. 이 마운령 경계선이 돌파된 때가 공민왕대이다.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공략과 함께 마운령 경계선은 돌파되었다. 초기철기시대 이래 천 수백년동안 쉽지 않았던 이런 상황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쌍성총관부 함락 이후 마운령경계선이 돌파되고 두만강까지 국경선이 확장되는 과정은 불과 50-6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 깊게 관련 된 사람들은 조선에서 도망한 월경자들, 그리고 조선의 주인이 된 이성계 집안이었다고 할수 있겠다. 이성계 집안이 조선의 지배자로 올라서지 않았다면 아마 함경도는 한국의 영토로 들어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2022. 12. 25.
고려의 사민徙民과 발해민의 투항 1. 고려전기는 조선전기 만큼이나 활발히 북진이 이루어지던 시기로 고려 태조의 건국 이후 약 100년간 압록강 하구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흥미로운것은 고려 전기에는 사민 기사가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누락되었을 수도 있지만, 완전히 없지는 않으니 대표적인 것이 아래 몇 가지다. 서경에 사민하라는 전교 (918년): 丙申 諭群臣曰,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宜徙民實之, 以固藩屛, 爲百世之利.” 遂爲大都護, 遣堂弟式廉, 廣評侍郞列評守之. 서경에 고관대작 집안을 이주시키라는 전교 (922년): 是歲, 徙大丞質榮·行波等父兄子弟, 及諸郡縣良家子弟, 以實西京. 幸西京, 新置官府員吏, 始築在城. 親定牙善城民居. 남쪽 백성을 북쪽으로 옮기라는 전교.. 2022. 12. 24.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