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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년대홍수14

을축년대홍수 기념 나청호 대선사 봉은사 학술세미나 대략 2년 전쯤 이병두 선생 주선으로 강남 봉은사로 원명 주지스님을 만날 일이 잠깐 있었다. 그에서 나는 스님께 2025년이 을축년대홍수 100주년 되는 해요, 또 마침 당시 대참사에서 이곳 주지로 계시던 나청호 선사가 한강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이재민을 무수히 구제하시고, 또 그 내력을 담은 기념비까지 사찰 경내에 있으니, 그냥 넘길 수는 없을 듯하니 뭔가 기념사업을 꾸려 봤으면 좋겠다 말씀드렸다. 그때 드린 말씀이 저 학술세미나로 직접 연결되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다만 함께 자리한 이병두 선생이 계속 이런저런 인연을 고리로 봉은사에 간여하니, 선생이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을축년대홍수 학술세미나를 말씀드리지 않나 하는 막연한 생각은 해 본다. 이 자리는 봉은사가 주최하는 곳인 까닭에 나청호 선사 구제활동.. 2024. 10. 5.
을축년대홍수를 둘러싼 호외號外 경쟁 호외 발행날짜가 안 보여 안타깝다. 1925년 을축년대홍수는 단군조선 이래 한반도가 경험하지 못한 미증유의 대란大亂이었으니 아마도 빙하기가 끝날 무렵 한반도 지형을 바꾸었을 그 시대 격변을 능가했으며 곧이어 전개될 한국전쟁의 그것도 이에는 미치지 못했다. 저는 여러모로 한반도사 획기였으니, 그 이전에도 있기는 한 구호사업의 혁명을 불러왔으며 그 타개를 위해 공공사업을 시작했고 국토 개조 사업 근간을 바꾸었으며 무엇보다 대중매체 시대로의 완전한 전환을 알린 신호탄이었으니 막 이 땅에 피기 시작한 언론출판문화 역시 혁명을 불러와서 참사는 곧 돈이 되는 시대라 이 참사는 각종 화보로 제작 배포되었으니 그 선두에 신문사들이 앞장섰다 하나, 조선총독부 역시 묵직한 화보집을 만들어 조선을 홍보하는 호재로 쓰기도 했.. 2024. 7. 17.
을축년대홍수 기념물을 찾아나선 7년 전 오늘 가는 날 장날이라고 모처럼 부자가 서울 역사문화 탐방에 나선 한창에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이들을 관통하는 분모는 을축년대홍수다. 이 사건을 아드님이 정리하고자 한단다. 주제는 내가 추천하고, 그 현장 몇 군데를 찾았다. 나는 가이드였다. 사진도 지가 찍고 메모도 지가 했다. 간단한 사진 조작술과 답사 메모하는 방법을 갈쳤다. 어떠한 성과로 모습을 드러낼지는 제 몫이다. 지놈이 찍은 사진을 다운로드 했더니 대강 흉내는 냈다. (2017. 5. 14) *** 누누이 강조하지만 내년 2025년이 1925년 을축년대홍수 백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조명하기 위한 움직임이 아직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저 사건이 얼마나 큰 상흔을 남겼는지 서울만 해도 곳곳에 저와 관련한 기념비가 있는 데서 확인한다. 2024. 5. 14.
1930년대 당인리발전소가 격발하는 상념들 지인 임태우 선생이 1930년대 당인리발전소 라 해서 소개한 사진인데 ai로 증폭했다. 출처는 모르겠다. 그에 의하면 1929년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착공을 하면서 이듬해 마포 당인리에 당인리화력발전소로 개업했다 한다. 그의 말마따나 한강을 유유히 지나가는 돛을단 배도 보이고 발전소 주변에 초가도 보인다. 당인동15-3번지에는 뱃사람들이 제를 올린 부군당이 있다는데 현재도 남았는지는 모르겠다. 유의할 점은 한강이다. 백사장이 발달했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산림파괴에서 비롯한다. 조선은 17세기 중반을 지나며 전국토가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비만 왔다하면 상류에서 토사가 쏟아져내려 강바닥은 저와 같이 온통 백사장이었다. 자연 하상이 높아졌고 그에 따라 한강은 툭하면 범람해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강폭은 지.. 2024. 2. 26.
미증유의 대재난 을축년대홍수, 공공사업으로 이재민 구조에 나서다 다시금 말하지만 1925년 을축년대홍수는 단군조선이래 한반도가 직면한 자연재해로는 미증유였고 그 피해 역시 전국적이었으며 이재민만 물경 60만을 양산했다. 이런 미증유 사태에 정부는 어찌 반응했는가? 우리는 자꾸만 이 시대를 국권을 상실한 시대로 설정하니 정작 봐야 할 것들은 제대로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가 되었으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시기는 권력 공백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권력으로 대체된 시절이라는 점이다. 국권을 상실한 적은 없다. 그 국권의 주체가 대한제국에서 대일본제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저 시대를 국권상실로 치환하니 식민당국의 모든 행위는 불법탈법이 될 뿐이다. 권력탈취가 합법이었던 적은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없다. 고려왕조 개창 조선왕조 개창 역시 다 불법탈법이었다. 그렇다 해서 우리는 .. 2024. 2. 17.
조선총독부 시정25년사가 증언하는 1925년 을축년대홍수 2) 기타 한·수해 구제 조선에서 한해와 수해는 거의 매년 일어나서 일일이 거론하려면 한이 없는데 1919년의 한해에 이어 특별히 기록해야 할 것은 1924년(大正8)의 한·수해와 1925년(대정9)의 대수해다. 1924년(대정8)은 갑자년甲子年으로, 조선의 미신에 따라 일반의 무지한 인민 사이에 연초부터 인심이 흉흉했다. 그런데 모내기철이 되어 쌀 산지인 남선南鮮 지방에 대한해가 일어났고 모내기를 할 수 없는 논은 전남 전북 경북 경남 충남의 여러 도에 걸쳐 약 26만 1천 정보에 달했으며, 약 300만 석이 감수減收할 것으로 예상되어[520] 남선 일대의 인심은 날로 험악해져 갔다. 이에 총독부를 비롯해 도 당국에서는 최선으로 그 대책을 강구했다. 전남도청의 경우는 솔선해서 이들 재해지의 대용작代用作..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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