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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품왕(伊尸品王) 금관가야 제5대 왕으로, 이품(伊品)이라고도 하니, 尸는 아마 사이시옷에 대한 표기 아닌가 한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5대 이품왕(伊品王)은 아버지가 거질미(居叱彌)이며 어머니는 아지(阿志)다. 병오년에 즉위해 16년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6대 좌지왕(坐知王)은 김토왕(金吐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이품(伊品)이며 어머니는 정신(貞信)이다. 정미년에 즉위해 14년을 다스렸다. 삼국유사 제2 기이(紀異)2 가락국기(駕洛國記) : 이시품왕(伊尸品王), 김씨(金氏). 영화(永和) 2년에 즉위. 치세는 62년, 의희(義熙) 3년 정미(丁未; 407) 4월 10일에 죽음.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음. ☞이품왕(伊品王) 2018. 3. 7.
거질미(居叱彌) ☞거질미왕(居叱彌王) 2018. 3. 7.
거질미왕(居叱彌王) 화랑세기 유신공 전 : 금관가야는 수로청예왕(首露靑裔王)에서 비롯하였는데 황룡국(黃龍國) 여자인 황옥(黃玉)을 아내로 맞아 거등(居登)을 낳았다. 거등은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을 아내로 맞아 마품(馬品)을 낳았다. 마품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를 아내로 맞아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는 아궁(阿躬) 아간의 손녀 아지(阿志)를 아내로 맞아 이품(伊品)을 낳았다. 이품은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을 아내로 맞아 좌지(坐知)를 낳았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4대 거질미왕(居叱彌王)은 금물(今勿)이라도고 한다. 아버지는 마품(麻品)이며 어머니는 호구(好仇)다. 신해년에 즉위해 55년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5대 이품.. 2018. 3. 7.
마품왕(麻品王) 금관가야 제3대 왕으로 김수로 손자이며, 거등왕 아들이다. 재위기간은 253~291년. 화랑세기 유신공 전 : 금관가야는 수로청예왕(首露靑裔王)에서 비롯하였는데 황룡국(黃龍國) 여자인 황옥(黃玉)을 아내로 맞아 거등(居登)을 낳았다. 거등은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을 아내로 맞아 마품(馬品)을 낳았다. 마품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를 아내로 맞아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3대 마품왕(麻品王)은 아버지가 거등왕(居登王)이고 어머니가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인 모정부인(慕貞夫人)이다. 기묘년에 즉위해 32년을 다스렸다. 삼국유사 제2 기이(紀異)2 가락국기(駕洛國記) : 마품왕(麻品王),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2018. 3. 7.
걸해대왕(乞解大王) 신라 제16대 임금(재위 310~356)인 걸해니사금의 다른 명칭. 삼국유사 권3 흥법 3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염촉滅身) :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상고해 보면, 사인(舍人.이차돈-편자 주)은 그때 나이 26세였고, 아버지는 길승吉升, 조부는 공한功漢, 증조曾祖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다. ☞걸해니사금 ☞흘해니사금 2018. 3. 7.
걸해니사금 ☞흘해니사금 2018. 3. 7.
긴장을 계속하는 나당관계 "주인이 자기 다리를 밟으면 개가 주인을 무는 법입니다." 다시금 찬찬히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을 읽다가 마주한 대목이다. 백제를 멸한 당이 이번엔 함께 백제를 정벌한 신라를 치려하자, 이를 감지한 신라 조정에서 대처 방법을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 이 와중에 군사적 대응에는 미온적인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겨냥해 김유신이 한 말이다. 이 대목이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中)에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당이 백제를 멸하고는 사비(泗沘) 땅에 진영을 치고 신라 침공을 은밀히 도모했다. 우리 왕이 이를 알고는 여러 신하를 불러 대책을 물으니, 다미공(多美公)이 나와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을 의복을 입혀 백제인으로 꾸며 역적 행위를 하게 하면 당군이 반드시 이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 틈을 타 싸움을 벌이면 뜻을 이룰 수.. 2018. 3. 7.
신라도 당을 믿지 않았으며, 당 역시 신라를 믿지 아니했다 국제관계. 이거 참말로 묘하다. 세계제국 당에 신라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숙적 고구려를 정벌하려다가 망신을 당한 당은 호시탐탐 그 정벌을 기회를 노리다가 신라와 접근했다. 배후에서 신라가 고구려를 견제하고, 여차하면 군사적으로도 호응해야 했다. 그래야 고구려를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라 역시 숙적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당에 접근했다. 이런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신라와 당은 밀약을 한다. 백제는 신라가 갖고, 고구려는 당이 갖는다. 당은 고구려 서울 평양을 갖는다. 평양 이남 고구려 땅은 신라가 갖는다. 하지만 신라도 당을 결코 믿은 적 없으며, 당 역시 신라를 믿은 적이 없다. 언젠가는 칼끝을 겨눌 상대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으며 실제로도 그리되었다. 신라와 합세해 백제를 멸한 당의.. 2018. 3. 7.
잡간迊干, 혹은 잡찬迊飡과 소판蘇判 ‘迊’이라는 글자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淸代에 완성한 《강희자전康熙字典》을 보면, 이 글자를 【酉集下】 【辵部】에 배치하면서, 그 발음은 《광운廣韻》을 인용해 ‘子와 答의 반절(子答切)’이라 하고, 이어 《집운集韻》을 응용해서는 발음은 ‘作答切’이라 하면서, “帀라는 글자와 같다. 두루 갖춘다(혹은 두른다)는 뜻이다. 止를 거꾸로 세워 帀이다. 더러 ○라고 쓰기도 한다(同帀。周也。从反之而帀也。或作○)”고 했다. 나아가 《正韻》을 인용해서는 “세속에서는 잘못 써서 匝이라 쓰기도 한다(俗譌作匝)”고 했다. ○는 자판에서 글자가 지원되지 않지만 ‘迊’이란 글자에서 책받침 안 글자 ‘帀’이 ‘市’인 글자다. 이로써 보건대 ‘迊’이라는 글자는 발음으로는 ‘잡’이고, 뜻은 ‘周’, 곧 ‘빙 두.. 2018. 3. 7.
월함산(月含山) vs 함월산(含月山) vs 토함산(吐含山) 이 석가탑중수기는 내가 2005년 9월 14일에 '불국사 석가탑 중수기 발견, 보존처리 중'이라는 제하 기사로 보도함으로써 세상에 존재를 알린 데다, 그에 대한 본격적인 문서 검토 또한 내가 가장 먼저 손을 댔으니, 2007년 3월 신라사학회가 개최한 제59차 학술대회에서 안승준과 공동으로 발표한 '釋迦塔(无垢淨光塔) 重修記에 대한 초보적 검토'라는 글이 그것이다. 이 글은 직후 신라사학회 기관지에 정식으로 수록되었다. 국립박물관은 이 보도에 할 수 없이 전체 중수기 중 달랑 석장만 공개했거니와, 첨부사진은 그 석장 중 하나이니, 이 석장짜리로 진행한 검토는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에서 적지 않은 발견을 했다고 자부했거니와, 그러는 과정에서 무척이나 의아스런 대목이 고려 초기 현종시대.. 2018. 3. 6.
성목태후(聖穆太后) 신라 제39대 소성왕(재위 799∼800) 어머니이자 혜충태자비다. 소성왕 즉위와 더불어 성목태후로 추증된 것으로 보아, 아들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했음을 안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소성왕 : 원년(799)…8월에 어머니 김씨를 성목태후(聖穆太后)로 추봉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39대 소성왕(昭聖王)은 소성왕(昭成王)이라고도 하며 김씨다. 이름은 준옹(俊邕)이다. 아버지는 혜충태자(惠忠太子)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이다. 비는 계화왕후(桂花王后)이며 숙명공(夙明公) 딸이다. 기묘년(799)에 즉위했으나 붕(崩)했다. 2018. 3. 6.
렴철(廉哲) 신라하대 소성왕 때 흰사슴을 받친 냉정현령이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소성왕 : 원년(799) 봄 3월에…냉정현령(冷井縣令)인 렴철(廉哲)이 흰 사슴[白鹿]을 바쳤다. 2018. 3. 6.
염철(廉哲) ☞렴철(廉哲) 2018. 3. 6.
소성왕(昭成王)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소성왕 : 소성왕(昭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준옹(俊邕)이며 원성왕(元聖王)의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이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소성왕 : 2년(800) 6월에…왕이 죽어 시호를 소성(昭聖)이라 하였다. ☞소성왕(昭聖王) ☞김준옹(金俊邕) 2018. 3. 6.
박거물(朴居勿) 신라 하대 문장가. 삼랑사비문을 썼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또 들으니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고, 고구려 역시 고신씨(高辛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고씨(高氏)라 했다.”고 한다. 2018. 3. 6.
설인선薛因宣 김유신비를 지은 신라 국자박사. 어느 시대에 속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김유신이 죽은 직후 비문을 썼다면, 문무왕 때다. '薛'이 성이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또 들으니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라 했고, 고구려 역시 고신씨高辛氏 후예이므로 성을 고씨高氏라 했다.”고 한다. 2018. 3. 6.
경(敬) ☞부여경(扶餘敬. 혹은 夫餘敬) 2018. 3. 6.
부여경(扶餘敬/夫餘敬) 의자왕 아들로 백제 멸망 이후 당이 백제왕으로 책봉한 부여륭의 아들로, 즉천무후에 의해 백제왕에 책봉되긴 했지만, 허울뿐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의봉(儀鳳) 연간에 (부여)륭을 웅진도독(熊津都督)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무리들을 안정시키게 하고,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때 신라가 강성하므로 융은 감히 고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의탁하여 다스리다가 죽었다. 무후(武后)가 그의 손자 경(敬)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으나 그 땅은 이미 신라ㆍ발해말갈(渤海靺鞨)에게 분할되어 나라의 계통이 드디어 끊기고 말았다. 2018. 3. 6.
지수신(遲受信) 백제부흥운동에 가담한 백제인으로, 임존성을 마지막까지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용삭 2년(662) 7월에…왕인 부여풍이 몸을 빼서 달아났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혹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하는데 [당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얻었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함께 모두 항복했으나 홀로 지수신(遲受信)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나머지 무리도 모두 평정됐다. 삼국사기 권 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上 : 3년(663)…5월에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 2018. 3. 6.
사타상여(沙陁相如) 흑지상지(黑齒常之)가 이끄는 백제부흥운동군에서 별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나중에 당군에 항복했다. 사타(沙陁)는 복성(複姓)이며, 이름이 상여인데, 아마 고대 중국 저명한 정치가 인상여(藺相如)나 전한시대 저명한 문학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에서 따온 듯하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이보다 앞서 흑치상지(黑齒常之)가 흩어진 무리를 불러 모으니 10일 만에 돌아와 붙은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보내 쳤으나 상지가 막아 싸워 이겼다. 다시 200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은 이길 수 없었다. 상지가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陁相如)와 함께 험한 곳에 의지해 복신에게 호응하다가 이때가 되어 모두 항복했다. 인궤(仁軌)가 진심을 보이면서 임존성을 빼앗아 스스로 공을 나타내게 .. 2018. 3. 6.
김흠(金欽) 복신과 도침이 주도하는 백제부흥운동 진압을 위해 출동한 신라 장수. 백제군에 패하여 갈령도에서 도망쳤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무왕(武王)의 조카 복신(福信)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렸는데 이때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신라왕 김춘추가 조서를 받고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하게 하였다. [김흠이] 고사(古泗)에 이르자 복신이 맞아 쳐서 이기니 김흠이 갈령도(葛嶺道)로부터 도망하여 돌아갔고, 신라는 감히 다시 출병치 못하였다. 2018.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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