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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81

꽃남, 화랑花郞 은 고려 중기의 문인 이인로李仁老(1152-1220)가 지은 시화집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에는 고려 이전, 특히 신라시대 이야기도 적잖이 들어있다. 김유신과 천관녀 이야기가 나 도 아닌 에만 실려있는 것처럼, 그가 담은 신라 이야기는 상당히 사료적 가치가 높다. 그 중 권下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화랑 얘기를 보자. 이 글만으로 우리가 대강 알고 있는 "나라를 위해 목숨바치는 우국지사" 화랑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글자 그대로 "꽃남"들을 뽑아서 일종의 마스코트를 삼은 듯이 묘사하고 있는데, 신라시대에 화랑이 어땠는지는 둘째치고, 고려 중기 "화랑"의 이미지란 그런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2021. 7. 11.
도굴당하고 복구하고, 기구한 무덤의 팔자, 이규보가 증언하는 도굴 존경하는 페친인 김 모 선생님께서 일찍이 고려 왕릉의 도굴상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 에도 고려 중기 왕릉의 도굴과 관련되는 자료가 나타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요조하신 현비賢妃의 옥체를 매장한 지 겨우 1백 년이 지났는데, 천유穿窬의 소도小盜가 금품을 훔쳐 냄이 구천九泉에까지 미쳤나이다. 이에 위태롭고 두려운 생각이 겹쳐 완전한 수리로 복구하기를 도모하고, 먼저 정성의 제물祭物을 베푸오니 밝게 들으시기를 우러러 아룁니다. 간릉簡陵이라는 능을 수리하기 위해 태묘와 경령전에 알리는告諭 글이다. 에서는 간릉을 산직장상散職將相 둘이 지키는 능 중 하나로 언급할 뿐 주인을 알 길이 없는데, 여기서 그 주인을 '현비'라고 한 걸 보면 문종의 비인 인경현비仁敬賢妃 이씨가 아닐는지? '천유'라는 표현을.. 2021. 7. 3.
서도書道에 대對하야 1950년, 6.25 직전 열린 제2회 국전을 보고 당대의 예술가들이 좌담회를 열었다. 이 분들께 꽤나 뜨거운 주제는 '서예'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였다. 재밌게도 서양화 하시는 분들이 그에 대해 크게 둘로 갈렸는데, 이응로(1904-1989)와 이쾌대(1913-1965), 남관(1911-1990)은 그래도 좀 옹호하는 쪽이었고 박영선(1910-1994)과 배운성(1900-1978)은 썩 좋게 보지 않았다. 심지어 배운성은 "서예는 공예 속에 넣으면 어떨까 생각하는데"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을 툭 끊고 다음과 같이 일갈한 분이 있었다. 무식한 말은 집어 치우시요. 서예가 어째서 공예 속에 포함될 수 있단 말이요. 대실언大失言이니 취소하시요. 그러한 망발이 미술가의 입에서 발언되었다는 것을 나는 불쾌히 생각.. 2021. 6. 27.
졸옹拙翁 최해崔瀣, 조상 최치원崔致遠을 평가하다 고운 최치원 하면 경주 최씨의 시조요, 나이 12세에 당에 들어가 빈공과에 급제해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어지러웠던 신라 하대 개혁안을 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리저리 방랑하다 가야산에 들어가 생을 마쳤다는 문학가요, 정치인이요, 경세가였다. 그 후예 중에 졸옹 최해崔瀣(1287-1340)라는 분이 있었다. 고려 후기 원 간섭기에 원나라 과거에 급제했고, 삼국시대부터 고려 후기에 이르는 문학선집인 을 엮은 사람이니 그 또한 고운의 피를 이었다 자부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고운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우리 집 문창공(文昌公 최치원)이 12세의 나이에 서쪽으로 가서 18세인 함통(咸通) 15년 과거에 올라 중산위(中山尉)를 지내고, 회남(淮南) 고 시중(高侍中)의 막(幕)을 보좌하였고, 벼슬이 .. 2021. 6. 23.
지리산 단속사에 있던 고려 문서 권21에는 뒷날 무오사화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선비 김일손이 지리산을 구경하며 남긴 이란 글이 있다. 자료를 찾을 일이 있어서 그 글을 보다가 지금은 쌍탑만 남은 단속사를 보고 감상을 적어놓은 부분을 만났다. 담장에서 서쪽으로 백 보쯤 돌아가면 수림(樹林) 속에 절이 있는데, 편액(扁額)에 “지리산 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 씌였고, 비(碑)가 문전에 섰는데, 바로 고려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의 소작인 대감사(大鑑師)의 명으로 완안(完顔 금국(金國))ㆍ대정(大定) 연간에 세운 것이다. 문에 들어서니 옛 불전(佛殿)이 있는데 구조가 심히 완박하고, 벽에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화상이 있다. 사는 중이 말하기를, “신라 신하 유순(柳純)이란 자가 국록을 사양하고 몸을 바쳐 이 절을 창설하자 단속(.. 2021. 6. 23.
땅에서 하늘까지 높이 내 옛사람에게 들으니 / 吾聞於古人 하늘에서 땅까지의 거리가 / 蒼穹之去地 이억 만 팔천하고도 / 二億萬八千 칠백 팔십 리란다 / 七百八十里 이규보의 속 구절이다. 2억 만 팔천 칠백 팔십리라...億이란 10만을 가리키는 단위였으니 218780리. 조선시대의 단위로는 10리가 대략 5.4~5.7km였다니 5.5km라고 하고 계산해보면 12만 329km 남짓이 된다. 대류권, 성층권, 중간권, 열권은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런가 하면 또 하늘과 땅 사이의 높이를 이렇게 본 분도 있었다. ‘노락당老樂堂과 하늘 사이가 한 자 다섯 치 밖에 되지 않는다’ 흥선대원군이 그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운현궁을 대대적으로 지어올릴 때 당시 대제학이던 김병학이 지어올린 의 한 대목이다. 지금도 노락당은 엄연히 남아 있는데, .. 202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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